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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May 22. 2023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최지인, <1995년 여름>에 기대어

1995년 여름


                                                          최지인



  이놈의 집구석


  넌더리가 난다고 했던 주말 오후에는


  소면 삶고 신 김치 잘게 썰어


  양념장에 비벼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귀를 막았다


 


  어머니는 멍든 눈으로


  부서진 가구를 밖에 내놓고


  금이 간 유리창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


  출근하지 않고 틀어박혔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나는 동급생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녔다 자전거를 훔


쳐 타고 슬프다 슬펐다 언덕을 오르내렸다 가장 먼 곳을 향


해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았다 옳다고 믿었던 건 옳지 않은 것


뿐이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나는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여성복 점원이 엄마야? 하고 물을 때


  누나예요 하고 답하면 어머니가 생긋 웃었다


 


  강 너머에서 어느 일가족이 연탄가스 마시고 세상을 버렸


다 세상은 반듯하게 누워 뭉그러졌다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어머니도 한때는 무용수였다 나


는 종종 무대에서 춤추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팔과 다리를 길게 뻗었고 박수와 함께 허공 속


으로 사라졌다


 


  나는 시시한 이야기를 지어낸 셈이다


 


 


                                    *


 


  잠든 어머니 가슴에 귀를 대고


  가만히 숫자를 셌다


 


  그해 여름


  어머니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서


  이룬 게 거의 없었다


 


                    -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창비, 2022


어릴 적 나의 도피처는 책과 일기장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나기만 기다렸던 날엔 일기장을 꺼냈다.

쓰고 또 쓰다 꺼내놓아 버린 마음이 행여 들킬까 봐 연필로 긋고 긋고 칠했다.

그러다 구멍이 나기도 했다.


슬퍼서 죽을 것만 같던 날 밤에는 책으로 도망쳤다.

두꺼운 책이 곁에 있으면 살 것 같았다.

주인공이 되어 스러지면 어떨까 상상하고, 객혈을 하면 나도 세상을 등질 수 있는 건지 궁리했다.


쨍그랑 챙그랑 와장창.

크고 큰 소리들이 둘러싸던 날 밤.

꿈에서 엄마는 네모난 아파트를 줄에 매어 슬픈 표정으로 끌고 갔다.

선잠에서 깨면 문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불빛이 무서웠다.

엄마도 꿈을 꾸는 사람이었을 텐데, 내가 붙잡은 그날 이후 불행해진 게 아닐까 미안했다.


팔과 다리를 길게 뻗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기타를 쳤다.

캐논도 슬펐고 아르페지오도 슬펐다.

엄마는 책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많이 슬프다.

그래서 슬퍼 슬퍼 슬퍼 말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종이에 휘갈겨 쓰다 찢겨버리면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되지 못할까 봐

이렇게 여기에 슬프다 슬펐다 많이 많이 쓰고 있다.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글을 쓰던 그 시절.

이제 나는 많은 걸 알아버려서 스스로 죽으려 하지는 않지만

오늘 쓰지 않으면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아서 글을 쓴다.


괜찮아 괜찮아

울어도 돼 오늘 같은 날엔 조금만

슬프다 슬프다 언제까지 말하면 안 슬픈 마음이 되는 거지

괜찮다 괜찮다 하면 안 괜찮은 마음도 괜찮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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