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가방을 사지 않을 권리를 줘라.
아직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있다면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번달에는 어쩌다 보니 한 달의 절반을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는 일본에 머무를 때마다 긴자 근처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곤 하는데 긴자라는 그곳이 일본 사람에게도 콧대 높은 곳으로 유명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 특히나 외국인, 그중에서도 후줄근한 외국인에게는 가차가 없는 곳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둘 모두에 해당한다.
한주는 이런 일이 있었다. 캐리어 가방으로 유명한 독일 브랜드의 긴자 지점이었는데 물건이 없다는 명성에 걸맞게 나 같은 외국인들이 캐리어를 사기 위해서 줄을 잔뜩 서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서양인이고 나는 동양인이라는 차이와 나는 아마도 일본어가 가능하고 그들은 일본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차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 캐리어 가게 직원은 나에게 줄 조차 세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물건이 없다는 이유였는데 나는 구경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캐리어가 없어서 왔다고 일본어로 말했으나 그는 네가 찾는 캐리어는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내가 강하게 항의하자 나중에는 알루미늄 캐리어라도 괜찮겠느냐 (그러니까 비싼 캐리어라도 괜찮겠느냐)라고 말하는 그에 말에 내가 돈이 얼마라도 상관없으니까 캐리어나 내놔라라고 노골적으로 대답하고 나서야 그는 앞에 있는 손님들이 캐리어 사버리면 뭐.. 손님께서는 원하는 캐리어는 못 살 수도 있어요 라는 찌질한 말을 남기고 나를 줄 세워주었다.
더 재밌는 건 내가 물었을 때 그는 옛날에 단종되었다는 그 캐리어가 재고가 떡하니 있었고 나는 나에게 물건을 판 셀러한테 내가 겉모습이 이래서 그런지 몰라도 줄 조차 세워주려고 하지 않더라라고 셀러에게 웃으면서 항의를 날렸다만.. 더러운 기분은 어디 가지 않았고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구질구질한 꼴로 백화점을 가도 모두 나에게 물건을 팔아주어서 그런지 더더욱이나 미스터리로 남는다. 말이 안 통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물건을 사고 야 물건 내놔라 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는 내 일본어에 문제가 크게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영어로 응대했던 것도 아니니 언어의 문제는 분명 아닌 것 같다. 존댓말로 말하지만 꺼져라라는 뉘앙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이나 행동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의 말. 사람들은 정말로 그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문제는 비단 일본의 문제는 아니다.
내 이웃 역시 사람을 겉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는 보통이 아닌 분이신데 하필이면 이를 내가 최악의 방법으로 알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집에는 집을 돌봐주시는 일을 해주시는 소장님분이 계신다. 처음 본 사람도 사람이 좋으신 분이시던데요?라고 하실 정도로 사람이 좋은 분. 내가 사람과 가깝게 가지 않아서 그렇지 먼저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인사해 주실 정도의 분이시다. 만.
나에게는 상냥했던 내 이웃이 그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지나갈 때. 그리고 그 태도에서 이 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능숙한 사람이라는 게 보이고 - 그 사람을 내 아랫사람으로 보고 있구나.라는 게 느껴질 때의 충격감은 정말로 말로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더더욱이나 나에게 상냥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더더욱. 아 이 사람은 내가 이 사람이랑 같은 집에 살고 있기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만약에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집에 살지 않았으면 저 사람은 나에게도 저럴 수 있겠구나.라는 그 충격감은 정말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하다.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가방을 꼭 사야만 하는 걸까? 그런 것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을 자유는 나에게 없는 것일까? 내가 맘에 드는 옷을 입을 자유는 나에게 없는 것일까? 맘에도 들지 않은 가방을 왜 내가 천만 원 이천만 원을 주고 남들이 인정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사야 한단 말인가.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남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는 이유로 사야 한다고 하면 정말로 스트레스받는다. 반대로 그런 물건이 없으면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 역시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사람을 칼로 찌른 것도 아니고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단지 돈을 쓰고 사는 데에 어떻게 '자격'을 논한단 말인가? 그들은 그들의 행동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행동들을 반복하는 것일 테니까.
사실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대놓고 말하는 스타일이라 (추가로 긴자에서는 언제나 그런 일을 겪는다. 후줄근한 외국인이라 물건을 안 팔아준다. 그러면 일본어를 멈추고 영어로 소통을 하고 다른 셀러를 데려달라고 한다.) 그나마 낫지. 그렇다고 해서 더러운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사실 더러운 기분 이전에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게 크다.
아무리 물질만능의 사회에 살고 있고 나 역시 물질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과연 물질을 들이는데 돈 이상의 자격이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긴자는 드레스코드가 필요하다고 하겠지!)
그리고 돈 이상의 자격이 있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평가하고 - 사람을 나누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막말로 전쟁 나면 포르셰가 총탄 막아주고 에르메스 가방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에르메스 가방이 맘에 들어서 사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는다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에서 에르메스 가방을 사야 하는 세태라면. 너무 몰개성적인 곳이란 생각이 든다.
에르메스 가방 이상의, 내가 나로서 존중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남을 그렇게 대하고 있으니까. 결국 세상을 굴리고 세상을 존중하고 사는 것은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지 않은가. 내 앞에 물건이 서있는 세상에 사는 기분이다. 문제는 그 물건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며 - 아무리 비싸봤자 차는 차고 가방은 가방이라는 물건의 본질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