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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Sep 27. 2023

생일 여행

나의 도쿄 기담.


나는 하네다 공항에 있고 지금 전화기 배터리는 2%이며 그나마 전화기를 충전할 수 있는 곳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생일 여행이라는 명목아래 몇 년 만인지 - 혼자 가까운 나라 일본에 왔다.

혼자라고 해도 한국에는 일도 많고 사연도 많아서 2박 3일 중 하루는 늦게 도착하여 술 한잔하고 하루가 가고 하루는 호텔에서 하루종일 자느라 하루가 가고 마지막 날을 좀 즐겨보나 했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문명의 이기란!

신용카드만 믿고 있다가 이렇게 된탕 당하다니.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만 평소에 지갑에 카드를 넣지 않는 버릇이 이렇게 결국은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아침 9시부터 출국 카운터를 넘을 수 있는 5시까지 꼼짝없이 행동에 제한을 받게 된 것이다.

신용카드만 믿고 현금을 1만 엔만 남겨뒀는데 그 신용카드가 이미 나보다 먼저 공항으로 출발한 캐리어에 딸려가 사실상 - 교통비와 원래 보려고 했던 전시의 입장료를 제외하면 - 계산 상 무일푼인 상황이었다.


이미 한국은 가을비가 스치고 선선한 가을인데도 도쿄는 땡볕 그 자체다.

하필이면 이번 여행은 친구의 생일이라고 고급 초밥집에 가느라 신발도 평소와 다르게 편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 나온지라 오래 걷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계속 지하철을 잘못 탄 죄로 땡볕에서 30분을 7cm 굽의 신발을 신고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발은 물집으로 너덜너덜해지고 까진 부위에서는 진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발을 구겨 신고서라도 테이트의 특별 전시전을 보기 위해서 국립신미술관까지 꾸역꾸역 걸어갔다.


‘빛’이라는 전시 테마답게 빛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모아둔 전시는 얼핏 보면 인상주의 그림 같다가도… 전시 뒷부분은 추상주의나 현대의 조소 작품 등 꽤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한가득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람도 한가득이었지만. 공간의 2/3은 사람인 상황에서 그림에 대한 설명은 도저히 읽을 수 없이 그냥 멀리서 그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건 일본사람들 인상주의 그림을 무척 좋아하는구나라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람들은 전부 19세기말 존 브렛의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이라는 그림 앞에 몰려있었다. 그 그림은 이 전시의 스타였는데 물론 그 화폭의 압도적인 스케일도 엄청나지만, 뭐랄까… 어딘가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에서 본 듯한 그 풍경 같은 느낌. 전체적으로 일본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몰려있는 그림들도 대부분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 아니라면) 경계를 압도적으로 흐려서 빛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인상주의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뒤의 비디오 아트 등 현대 미술에도 사람들의 카메라는 와닿았지만 그것은 예쁘다가 아닌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다에 가까웠다.


일본의 미술관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확실히 일본의 문화생활 수준은 누구나 접근하기 수월하고 - 부내가 난다. 선견지명이 있는 근대의 부자들이 하나둘씩 모은 작품들이 지금의 엄청난 방대한 컬렉션을 형성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였으면 불가능한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들만 초대장을 받아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관람의 날 등을 만드는 등. 특별한 접근성까지.

옆나라 사람으로서는 유럽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역시 대단하구먼이라는 질투 반 부러움 반의 눈길로 봐야 할지 복잡한 마음이 든다.


물론 그 부내조차 계속 보다 보면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특정한 장르 - 가령 인상주의나 중세의 종교화 - 에 몰려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리에이션조차 갖지 못한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그런 그림을 보고 자랄 수 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뭐 일본도 큰 도시에 사는 사람에 한해서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럼에도 똑같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도 뭔가 어린 친구들이 가까이 자주보고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키워드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덜너덜 해진 발만큼 혼자만의 여행이 남긴 게 무엇일까.

거대한 그림들을 실제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 좋은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음 내 1년은 괜찮을까라는 불안이 남은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일까. 매년 생일 무렵은 재수 없는 일들로 가득했었다.

작년에는 남편의 사업이 기울어 엄마가 주는 생일비도 남편 직원 월급으로 나갔으며 그 전해 생일에는 남편 직원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방을 팔았다.



올해 내 생일 괜찮을까.

아니면 도쿄에서 액땜을 전부 한 걸로 믿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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