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칠일
팔월 칠일. 입추다. 간만에 하이볼 한잔할까 하면서 한 모금 두 모금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집에 남은 두 캔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뭔가 아쉬워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이럴 때를 놓치면 안 될 거 같다. 취하기 좋은 밤이다. 호기롭게 주머니엔 지갑, 핸드폰 그리고 귀에는 에어팟을 꼽고 문을 나섰다. 터벅터벅 계단을 사뿐하니, 어쩌면 터덜터덜 내려와 건물 밖을 나서니 시원한 바람이 나를 반긴다. 오호, 무더운 여름이 그렇게 기승을 부리더니 결국은 입추의 밤을 못 이겨 모습을 감춘 것 같다. 그렇게 더위는 입추의 마지막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서늘함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알맞은 기온. 이제야 사람이 살 거 같은 온도를 지닌 날씨다. 정말 오래간만인 거 같다. 그래서 행선지를 집 앞 편의점에서 조금 더 먼 곳으로 잡았다. 이리저리 낯설지 않지만 낯선 대전, 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콧바람을 잔뜩 집어넣는다. 어쩌면 내일은 이런 적절한 기온을 질투해 날씨라는 놈이 너무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져 금세 나와 어색한 사이가 돼버릴 수 있다. 기회는 놓치면 지나간다. 사라져 버린 것보다 지나가는 게 더 아쉬운 건, 내가 뒤돌아 봤을 때 그 기회라는 놈이 눈앞을 아른 거린다는 것. 그러니 왔을 때 잡아야 한다. "기회는 어쩌구 저쩌구..." 어른들 옛말에 틀린 게 어쩜 하나도 없다. 괜히 약이 바짝 오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오늘은 누려야겠다. 이 적당한 모든 것을. 약 오른 마음 숨겨두고 즐겨야겠다. 이 기분 좋아지는 날씨를.
기분 좋은 이 밤에 무더운 여름날을 생각해 본다. 땀내 나는 온도가 아닌 거에 감사함은 충분히 느꼈으니 이젠 불과 얼마 전인 뙤약볕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글쎄, 어디 하나 좋은 게 없다. 출근할 때면 얼굴에 내리쬐는 햇빛이 그저 기분이 나쁘다. 안 그래도 출근할 시간이면 잔뜩 구긴 얼굴인데 햇볕마저 내 마음 무심히 내려오니 직장에 끌려가는 내 모습을 마치 놀리는 거 같다. 낮이라고 다를까. 양산 없이는 돌아다닐 수가 없다. 타는 듯한 느낌의, 기가 잔뜩 오른 날씨의 기승을 양산 없이는 이겨낼 수가 없다. 양산을 든 내 오른손에 맺힌 작은 그늘이 유일한 쉼터인 게 다른 의미로 킹받는다.
그래도 퇴근할 무렵, 기고만장하던 해가 무대 아래로 내려오고 본격적으로 달이 나타날 시간에 그 교차하는 주홍빛, 분홍빛 하늘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잠시 하늘 위 주인공이 해인지 달이었는지 모를 잠깐인 그 찰나, 그때의 내 머리 위 풍경은 오랜만에 내 스마트폰 카메라를 움직이게 만드는 모습이다. 이게 애증일까. 괜히 미워하다가 그리워지는 걸 하나씩 꼽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