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다행히 아빠의 CT 결과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가장 우려했던 간과 폐로의 전이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듣지 못했다는 것이 반가운 표현이 될 수도 있구나 싶던 날이었다.
수술받을 준비와 수술
아빠는 3월 15일 입원 후 이틀 동안 몇 가지 검사를 더 거친 뒤 17일, 수술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이틀 동안 대장 내시경도 받았는데, 직장 쪽에 암으로 발전할 것이 있어 떼어낸다고 들었다. 엄마가 아플 때부터 수없이 듣던 건강상태이지만, 여전히 낯선 단어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빠를 입원시킨 뒤 언니와 나는 집에서 큰 걱정 없이 수술 날을 기다렸다. 아니, 솔직히 언니는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평소에는 친구들에게 동네 걱정을 혼자 다 한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였지만, 이때에는 정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시 정정하자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빠의 수술은 동네 걱정을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우려이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긴 투병 시간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는 나쁜 버릇이었다. 엄마가 처음 암 진단을 받을 무렵 나는 사춘기 학생이었고, 그 버릇은 비약을 일삼아 엄마가 돌아가시는 날을 자꾸만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버릇은 결국 엄마와 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나는 암 환자 보호자 경력으로는 나름 경력자(?)였다. 그래서 이럴 때만큼은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지레 겁먹는 일이 없도로 나름의 멘탈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성공한 것은 아니다. SNS에 넋두리처럼 힘들다는 말을 자주 올렸던 기억이......
아빠가 심심할까봐 입원시킨 뒤 집으로 돌아와 언니와 함께 잠깐 전화를 했다. 그런데 누구보다 덤덤해서 꽤 놀랐다.
아빠의 다른 검사 결과는 그렇게 큰 문제가 없었던지 3월 17일, 아빠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 아침 날씨는 쌀쌀했고, 대표 보호자인 언니와 서브 보호자(?)인 나는 수술 전부터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나는 언니와 함께 있으려, 언니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빠를 배웅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은 예정시간보다 좀 늦게 시작할 예정이었는지 언니도 늦게 불려 갔다. 언니가 내게 물었다.
"아빠한테 전하고 싶은 말은?"
"수술받고 나와도 아프다고 찡찡대지 말기~"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찡찡대지 말기'는 언니가 잘 순화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아빠는 그렇게 언니와 내 메시지를 받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은 4시간 남짓 걸릴 예정이며 대장의 절반을 잘라낼 예정이라고 했다. 엄마는 자궁암 수술 때 완전 개복 후 자궁을 드러낸 것으로 아는데, 아빠는 대장의 절반을 잘라냄에도 복강경이라고 했다. 기술이 발전한 것인지, 엄마가 아플 때에 우리의 정보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단, '엄마도 복강경으로 수술했다면 덜 아파했을까'와 같은 지나간 후회에 대한 감상이었다.
아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기다리는 동안은 그리 괴롭지 않았다. 언니와 둘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와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다 나누고, 연애상담도 하고, 웃긴 짤 공유도 하고, 병원 내부를 몇 바퀴씩 돌며 탐방하는 등 나름 열심히 시간을 보냈다.
"언니, 나 저기 화장실은 너무 칸도 적고 채혈실 옆이라 사람이 많아."
"그럼 우리 걸어 다니면서 다른 화장실 찾아보자!"
(진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기다렸다.)
아빠가 수술실로 들어간 순간부터 아빠의 케어는 의료진의 몫이었다. 수술이 잘되게 해 달라 기도를 드릴 수도 있겠지만(TMI: 언니와 내가 불교신자이므로), 우린 그러지 않았다.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는 버릇이 발휘된 말일 수도 있으나, 아빠의 투병은 이제 시작이기에 수술하는 순간부터 불안에 떨진 않기로 했다. 물론 언니와 상의한 건 아니고 나 혼자 속으로 다짐한 것이었다.
(TMI: 다짐의 이모티콘)
p.s 조금 더 긍정적으로 살아보고자 해요. 나의 과거에도 상관없이 나를 바라보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