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그믐 Mar 16. 2020

#5 아빠의 병원 데뷔戰(전)②

아빠가 입원했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오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일찍 검사를 받는다면 예약도 일찍 당길 수 있다


병원에 문의했을 때 이 답변을 받게 되자, 우리는 빨리 검사를 받기로 결정했다. 일단 예약을 기존의 3월 16일에서 3월 12일로 앞당겨 놓고, 그 전날 코로나 검사를 받기로 했다. 그렇게 3월 11일, 아빠는 가기로 예약한 병원의 선별 진료소에 하루 먼저 들러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이럴 때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우리나라의 검사 속도가 만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말... 전날 오후에 검사받고 다음날 새벽 5시에 '음성'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거기에 더해 해당 병원에 예약이 된 환자이기 때문에 아빠의 검사 비용은 무료였다. 대신 실질적 보호자였던 언니 역시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언니는 해당 병원에 예약된 환자도 아니고 의사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사 비용은 비용대로 내고, 병원도 검사를 받아주는 선별 진료소를 찾아 서울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다녀와야 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에 대한 선별 진료 기준도 정확히 마련해주면 좋겠다는 생각... 언니가 이 글을 쓰는 최근 일주일 동안 너무 고생했다.) 언니 역시 결과는 '음성'이었다.


자, 이제 아빠를 입원시켜야 한다.



불행 중 다행이죠


예약 당일 대장항문외과를 방문했을 때, 아빠는 누구보다 초조해 보였다. 동행한 고모에게도 성질을 많이 부렸고, 언니와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고모는 아빠의 누나였기 때문에 아빠의 성질에도 우리 몫까지 열심히 잔소리를 해주셨다. 아빠의 불안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엄마가 처음 암 판정을 받을 때, 수술 경과가 좋지 않을 때, 암이 다른 부위에 재발도 아니고 새로 생겼을 때, 그리고 한 달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불안해 미치겠는 마음을 느낀 바 있다. 물론 내가 암에 걸렸을 땐 차원이 다른 불안함이 엄습할 것일 테니 모든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 앞에서 역정이 아닌 무서움을, 걱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투덜대는 거 맞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들어섰을 때 수많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보았다. '우리 가족만 이런 상황인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안심도 되고, 좀 더 의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가 이 글을 보는 일은 없겠지만 당신도 나와 같은 의연함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아빠의 투정 아닌 투정은 의사를 만나고서야 그나마 사라졌다. 의사는 우리가 가지고 간 대장 내시경 사진을 보며 아빠가 앞으로 해야 할 검사와 입원 날짜, 수술 날짜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빠는 의사를 만나자 긴장을 풀리는 한 편,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말을 더듬으며 당신의 궁금증에 대해 말했다. 정확히는 인공항문을 해야 하는지, 수술을 최대한 빨리 할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지금 위치가 그렇게 무서워하실 위치는 아닌 걸로 보입니다.
인공항문까진 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CT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의사의 답변에 아빠는 비로소 다행이라며 웃음 지었다. 아마도 엄마가 마지막 시한부 기간 동안 달고 지냈던 인공항문의 기억이 좋지 않았나 보다.


잠깐 이야기하자면 엄마는 췌장암 수술 이후 장루를 달았다. 더 이상 항문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 시기 부정적인 생각이 강해, '엄마가 죽은 사람과 다른 점이 몇 가지인가.', '엄마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의 짜증은 극에 달해 있었고, 가족 모두가 지쳐 나는 밥만 차리고, 밥을 먹으면 아빠가 설거지를 한 뒤 각자 방에 들어가 버리고 언니만 엄마 옆에 남아 장루를 갈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 본인이 대장암이라고 하니, 인공항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을 것이다. 나만큼이나. 아니, 아버지와 한 사람으로서 나보다 더 큰 고민이려나.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서, 의사는 아빠의 대장암 위치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물론 전이가 0이라는 전제 하에) 그 말 한마디로 뭔가 나는 오히려 내가 불행 안에 있다고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불행 안에 있는 건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그 안에서 그나마 나은 점을 찾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예 안 아프면 좋겠지만, 그럴 순 없으니 말이다. 아마 암 환자를 가족으로 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불행 중 하나의 다행 때문에 오늘도 살아가는 수많은 보호자들이 있다.



아빠 혼자 보내기



아빠가 입원 병동으로 올라가기 직전(뒷 좌석), 그리고 언니(앞 좌석 왼쪽). 안절부절못하는 아빠를 보니 괜히 내가 긴장돼서 기다리는 시간에 한동안 앉아있지도 못했다.


아빠는 3월 12일 진료 당시 몇 가지 검사를 받고, 3월 15일 자로 입원하게 되었다. 해당 병원에는 간호간병 통합 병동이 있어, 우리 가족 모두 통합 병동에 배정받기를 기도했다. 아빠는 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기 싫어서, 나는 언니가 아빠 짜증을 다 받아낼 게 싫어서, 언니는 본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기도했다. 보호자는 1인밖에 지정될 수 없기 때문에 현재 졸업생이고 무직(...)이자 엄마를 간호한 경력이 있는 언니가 그대로 맡기로 했다. 내가 항상 언니에게 미안해하는 이유다. 난 엄마 때에도 아빠 때에도 여전히 '전쟁 나도 학생은 학교에 가라'라고 할 때의 그 '학생'이다. (이렇게 구차한 변명을 해본다.)

아빠는 입원하는 날에도 짐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고모의 말에 역정을 내며 본인이 꿋꿋이 들고 가셨고, 그 모습이 한편으론 별로 아프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면서도 이제 곧 수술인데 사이좋게 들어갈 순 없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게 아빠는 혼자(언니와 함께) 입원 수속을 하고,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본격적으로 환자가 되기 위해 떠났다.



참 요 며칠 새 좋았다가 나빴다가, 원망했다가 걱정했다가 하는 감정이 번갈아 날 찾아왔다. 그래서 이번 글은 퇴고를 더 거치더라도 이렇게 난잡한 감정이 그대로일 것 같아 다듬기를 포기했다. 예정대로면 3월 17일이 아빠의 수술 날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3월 16일 오후 5시 30분이 넘어가는) 언니는 수술동의서를 쓰러 병원에 가 있고, 아마도 오늘 CT 결과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의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던 얘기는 바로 간과 폐 전이였다. 과연 언니는 어떤 소식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까.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글을 마친다. 다음 글도 오늘처럼 철없이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4 아빠의 병원 데뷔戰(전)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