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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믐 Feb 03. 2021

INFJ+집순이가 외출하면

계획형 성향 vs 집순이 성향

오늘은 아침부터 재난 문자가 죽죽 왔다. 

그중 신경 쓰이는 건 오늘 저녁부터 눈이 많이 온다는 소식이었다. 점심쯤이 되자 서울 지역은 미리 대설예비특보를 내렸다는 뉴스가 떴다. 휴대폰 날씨예보를 보니 내일은 하루 종일 눈 내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 저녁부터 눈이 내린다면, 내일 눈이 일찍 그친다 해도 오늘 내린 눈 때문에 길이 꽁꽁 얼어붙은 터였다. 즉, 외출하기 안 좋은 날씨가 된다는 거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오늘 외출을 하기로.


나는 내향형에 혼자서도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극강의 집순이라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내가 나갈 때는 정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있거나, 친구랑 약속을 잡았을 때이다. 혹은 이대론 성인병에 걸리겠다 싶어 산책하러 나갈 때. 그래서 오늘 외출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한 번에 모든 일을 다 처리해야 했다. 집순이의 가장 특징적인 행동 패턴인 '한번 외출할 때 몰아서 일 처리하기'가 발동된 것이다.



마음을 먹고 나니 나가서 뭘 할지 정해야 한다. 

최근 은행 공동인증서(구 공인인증서)를 휴대폰 번호를 바꾼 걸 까먹고 갱신했다가 다른 은행 어플에서 인증서 가져오기 ARS 인증이 되지 않아 난감했다. 아무리 찾아도 나 혼자 휴대폰 번호를 바꾸는 법이 없어 꼭 한 번은 은행을 가야 했다. 그런데 여태 가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미루고 있었냐면, 매달 납입되는 주택청약 적금에 이제 얼마가 모였는지 까먹을 정도다. 아주 소박한 금액이라 달마다 조금씩 푼돈 모으는 재미로 매번 은행 어플에 접속해 금액을 보고 혼자 뿌듯해하곤 했는데, 그러지 못한 지 두 달은 된 것 같다. 납입 결과 두 번 못 봤다고 총 모인 금액을 기억 못 한다. 그래서 더욱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어제는 못한 산책(이라 쓰고 나름 걷기 운동이라 읽는다)도 해야 한다. 오늘 아침 몸무게를 재 보니 그래도 저녁 6시 이후 금식 때문에 아침 빈속 몸무게가 그저께보다 1kg 정도 줄어있었다. 내일 아침 몸무게를 여기서 유지하거나 더 빼려면 30분 이상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집 근처에 자주 다니는 산책로가 있는데, 오늘은 거기를 한 번 왕복하는 것을 최소 목표로 삼았다. 농협 가려면 또 걸어야 해서 너무 많이 걷진 않기도 했다. (구차한 변명이다)


마지막으로 친구가 생일선물로 준 기프티콘 하나를 써야 한다. 매번 기프티콘을 선물 받으면 유효기한까지 다 쓰질 못해 현금으로 돌려받곤 하는데 친구한테도 좀 미안하고, 이게 다 귀차니즘 때문인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그래서 오늘은 큰 마음먹고 카페 가서 테이크아웃으로 기프티콘도 쓰고 오기로 했다. (이렇게 그나마 걷기 운동한 것은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런데 루트를 잘못 짜서 생각보다 더 많이 걸었다.

집에서 가까운 순대로 나열하면 산책로-은행-카페이다. 그래서 산책을 먼저 하고, 은행에 가서 일을 처리하고, 입가심으로 카페를 들렀다 오는 게 최상을 선택이었다. 그런데 내가 은행 때문에 유독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거두절미하고 집 밖에 나오자마자 은행으로 향했다. 사실 난 이상할 때 사회성 있고 이상할 때 사회성이 없는 타입이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있으면 소심한 관종끼가 나오다가도, 은행, 동사무소, 휴대폰 대리점처럼 뭔가 서류를 쓰고 상담받아야 하고 그런 곳을 혼자 잘 못 간다. 그래서 오늘은 더 특별(그냥 내 표현이다)한 날이었다. 내 사회성을 끌어올려 은행에 가야 하는 그런 날. 그런데 생각보다 은행에서 일 처리가 너무 부드럽게 빨리 잘 끝났다. 나는 은행 점원이 내가 말을 잘 못해서 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했는데 한 번에 알아들어 걱정했던 문제가 안 생겼다. 그래서 속으로 놀라고 하나가 해결됐다는 안도감에 휩싸여 그냥 은행만 들렀다 집에 와 버렸다(...)


집에 와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들어왔기에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암만 생각해도 내일 눈이 오면 못 나가니 오늘 계획한 일을 마저 하고 싶었다. (이럴 땐 영락없는 J(계획형)이다) 그래서 다시 나갔다. 집순이가 집에 오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나가는 건 정말 희귀한(?) 일이지만 이때는 집순이 성향보다 계획형 성향이 더 셌다. 그렇게 결국 다시 집을 나와 산책을 하고, 카페까지 내려가 기프티콘까지 쓰고 집에 왔다. 




매번 계획형이 이기는 건 아니다. 어느 날엔 너무 귀찮고 힘들어서 오늘 설거지를 내일로 미루기도 하고, 빨래를 다음날 또 그다음 날로 미루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내 급한 할 일을 다 했다는 점에서 이상하리만치 더 안도했다. INFJ+집순이인 사람은 외출할 때 내 안의 계획성과 집순이 기질이 마구 싸우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승자는 그때그때 다르다. 오늘은 마침 계획형 기질이 승리해 무사히 내 적금 계좌 잔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집에 와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먹으며 스스로 뿌듯해했다. 아, 계획한 대로 다 했다! 그러니 남은 시간은 좀 쉬어야지! (그리고 내내 쉬었다는 슬픈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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