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나는 꿈을 일상과 잘 연관시키는 편이다.
그날의 꿈이 사나우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생활하고,
괜히 일어나는 모든 에피소드에 꿈 때문이라는 이유를 붙이고 했다.
꿈을 잘 믿게 된 건 안 좋은 꿈은 꾼 날 실제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몇 번의 경험과,
그리운 사람이 떠난 뒤 꿈에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꿈을 나만의 소박한 초능력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어릴 적 어른들이 하는 말 중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있었다.
"어제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 나오더니 웃으면서 얼른 들어가라더라. 이제는 편히 가셨나 봐."
어린 마음으로는 꿈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왔는데 왜 슬프지 않고 안심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후, 내가 그 꿈을 꾸게 되었다.
엄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도 몇 달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배경은 우리 집도 아니었고, 내가 알고 있는 공간도 아니었고, 꿈에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엄마가 환하게, 아주 환하게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꿈을 여전히 기억하는 건, 이전에 꿈에서 만난 엄마와 달랐기 때문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 꾼 꿈들에서 엄마는 임종 직전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아파하고, 수척해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꿈을 제일 많이 꿨다.
그런데 몇 달 만에 아프기 전의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 날 보고 웃어줬던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날의 꿈을 꾸고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가족들의 꿈에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던데
'그래도 편히 가셨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이 엄마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처럼 그 뒤로 엄마가 꿈에 나오는 횟수는 줄었고 혹여 나오더라도 아픈 모습이 아닌 건강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엄마가 점점 꿈에 등장하는 횟수가 줄어듦에도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어디에 있던 그 사람이 일단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는 엄마를 향해 느끼고 있었다.
정말 새삼스레 이제야 말이다.
그 뒤로 그리워하는 사람을 꿈에서 만나는 걸 어쩌면 초능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과학적으로는 꿈이 모두 내 무의식을 바탕으로 나온 것들 일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초능력보다, 어떤 과학적 원리보다 강할 테니까.
그래서 내가 가진 이 소박한 초능력은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소중한 사람들은 꼭 존재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그들이 사랑하고 행복하길 바랄 테고,
그 누군가는 소중한 마음으로 먼 곳의 소중한 이를 꿈에서 만날 것이다.
- 추천곡: 박정현 <꿈에>
이전에 들을 때는 몰랐는데 여러 일을 겪고 들으니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닿는 노래였다.
내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노래 끝에 가사로 나와 있어 더욱 공감하며 들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곡이 위안을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