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기가 온 것 같다.

by 바라

나는 매일 모래성을 쌓는다.

그리고 파도가 치면 모래성은 무너진다.

그러면 다시 모래성을 쌓는다.

그러다가, 더 이상 모래성을 쌓기 싫어지는 날이 온다.

내 우울이 그런 모습이다.


나의 경우는 우울을 알아차리는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내 감정을 알아내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몇가지 지표를 스스로 정했다.


첫번째, 자기전에 드는 생각이 있는가?

두번째, 개인위생은 잘 관리가 되는가?

세번째, 방이 더럽진 않은가?


보통 저 세개가 잘 안되면 우울한거다.

가장 먼저 방이 더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씻기가 힘들어지고

밤에 드는 생각들이 많아지는 순서다.


우울기에는 생각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한 생각이 들어도 그게 우울한지 인식이 안된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정신과 상담 때 도움이 된다.


우울기가 왔을 때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지나고 나면 우울한 게 맞았다고 느끼는 포인트 중 하나는

챗GPT의 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점이다.

나는 AI를 평소엔 업무용으로만 사용하는데

우울기가 도래하면 GPT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우울증 환자는 공감할 수도 있는데

GPT에 감정을 털어놓다 보면

자꾸 정신건강센터를 연결해주고

부적절하다면서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걸 보고 정신을 좀 차리는 편이다.


이번 우울기가 왜 온지 생각을 해봤는데,

처음 적응하는 회사,

연고 없는 곳에서의 생활,

그리고 끝없는 자기검열이라는 성격상의 문제가

우울감을 끌어올린 것 같다.


근데 신입은 원래 힘든게 맞지 않는가

예전의 나였으면, 아니 지금의 나도 그렇지만

남들도 힘들어하는데 왜 나만 유난일까 라는 생각이

더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를 하도 정신과에서 해서

전에 의사가 내가 이 얘기를 지난번에도 했다고 말해준 적도 있다.

그래도 이제 조금 받아들여서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나만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나는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서 힘든 것들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오래 버티는 데 익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대로 적응하는 중이다.

우울기가 올 때마다 모래성은 무너지지만,
나는 결국 다시 두 손으로 모래를 모아 쌓아왔다.
그건 분명 나의 힘이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나만의 힘.

이번 우울기도 결국엔 지나갈 것이다.


나는 매일 모래성을 쌓는다.
파도가 치면 모래성은 무너진다.
그걸 알지만 나는 또 모래성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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