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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Nov 24. 2019

지금 우리는 같은 땅을 밟고 있나요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중학생 때 사촌동생과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나는 우등상과 선행상을 동시에 받던 학생이었다. 스스로도 착하고 바른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촌동생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내 부모의 경제적, 정신적 돌봄을 나와 함께 나누게 된 순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의 나는 그저 ‘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착했던’ 것이었음을. 그 아이와 함께 산 이 년 동안 나는 신데렐라가 아닌 신데렐라 언니였다. 그 아이가 떠난 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게 나였다. 그런 상황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던 나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졸자로 산다는 것. 이것 역시 대졸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고졸자다. 정확히는 대학 중퇴자이지만 더 정확히는 고졸이 맞다. 피할 방법이 없다. 나는 또다시 내 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좀 더 처절했다. 


이 사회와 이 교육제도로 나를 가둘 순 없어, 나는 나의 길을 갈 거야.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고 대학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빌 게이츠가 되고 스티브 잡스가 되었다. 못 돼도 서태지는 되겠지? 그런 낭만적 희망을 안고 나는 학교를 그만뒀다. 대학 중퇴가 천재의 필수 코스인 양 훗날 그때의 선택 덕에 이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할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이 무너졌다. 나는 실패했다. 서른. 서른이 되었을 때 나는 고시원에 있었고 통장에는 몇 천 원이 전부여서 은행에서 지폐 한 장 뽑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결국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십 년의 서울살이. 그 결과는 단순히 명문대생에서 고졸자로의 변화, 그 직함의 차이 이상이었다. 학자금 대출 같은 건 걱정해 본 적 없이 부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하던 명문대생과 집안의 수치가 되어 고시원을 전전하던 고졸자가 보고 느끼는 한국 사회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이라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그 정치적 진보라는 것은 현실에 그리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지 않았었다. ‘가난’,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난은 참 추상적인 단어이다. 가난에 대해 동정을 하든, 혐오를 하든 혹은 그것을 두려워하든 그들에게 있어 가난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진짜 가난한 사람이 느끼는 현실의 그 절박함,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나 역시 고졸자가 돼서야 대학 중퇴가 낭만이 아닌 진짜 현실로 다가왔다. 고졸자가 이 사회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차별 말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열심히는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고는, 남들만큼 열심히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내 열심을 다했다. 하지만 그 열심 끝에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의 감독들만큼 나는 시나리오를 잘 쓰지도 영화를 잘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화를 찍으며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이 나이의 고졸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한다느니 학력 차별을 없애겠다느니 하면서도 국가사업을 신청하는 데에 대학 졸업장은 필수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등을 물어왔다. 아마 내가 다니던 대학을 온전히 졸업하고 친구들과 비슷한 길을 갔다면 그런 질문이 고마왔을 것이다. 저 무슨 대학 나왔어요. 이것이 내 가치를 높여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워졌다. 대학 얘기가 나오면 괜히 주눅 들었다. 저 무슨 대학 나왔어요. 졸업은 못 했지만. 말줄임표. 겸연쩍 미소……. 그런 건 너무 머쓱하다. ‘저 고졸이지만 그래도 공부는 잘했어요! 무시하지 마세요!’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나를 변화시킨 것도 결국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지금의 남편. 남편은 서른 넘은 미혼 남녀가 흔히 겪듯 주위에 또 다른 미혼남녀만 있으면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는 주위 어른들의 수많은 권유 중 결국 나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을 자퇴했다니, 분명 주체적이고 강단 있는 여자일 거야! 나만큼이나 순진한 사람이 또 있었다.


나는 남편과 남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한없이 부끄러워했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게임을 좋아하는 남편은 온라인을 통해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 친구라는 사람들은 내가 여태껏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대학에 가지 않고 기술을 배워 어린 나이에 사회에 뛰어든 사람, 집안이 어려워 스스로 돈을 벌고 늦게나마 배움을 시작한 사람, 직업이 있고 재산이 있지만 여전히 방황하는 사람, 황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 등. 그 다양한 사람들이 나이나 학벌 따위에 관계없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관계를 맺으며 친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어느 명문대 학생이 쓴 글이 있다. 자기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이 대학에 들어왔으니 지방대 학생들과 좀 더 차별적으로 대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 그 글의 핵심이었다. 그 글을 읽으며 만약 내가 대학을 중퇴하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 이 글을 쓴 학생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겠구나 싶었다. 제발 나와 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해 주세요!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내 인생이 저들보다 더 가치 있다는 걸 확실히 구별해 주세요!


지구라는 이 작은 행성 속,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땅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하지만 고졸자와 대졸자는 서로 다른 하늘을 이고 있다. 지방대생과 명문대생 역시 다른 땅을 밟고 있다. 같이 살아가지만 서로 섞일 일 없고 서로의 존재를 알지만 애써 무시하며 결코 만날 일 없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무원이 된 친구들을 시기하며 그들처럼 되지 못한 내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던 많은 다양한 삶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인생이 결코 다른 누구의 인생보다 비참하다거나 가치 없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도 그들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하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함께 사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이 글은 나의 이러한 변화를 내 부모님께서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다. 자식을 교육시켜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며 마지막 소임이라 여기시는 평범한 이 시대의 부모님께, 나의 방황을 보며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했던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내가 겪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성장했고 더 큰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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