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간 어디쯤
아빠, 엄마, 저, 동생 그리고 믹스견 꿍이와 메추리 '꾸꾸'와 '까까'는 천국에 살고 있습니다,
일명, 빌라 천국.
우리 일곱 식구가 둥지를 튼 '화곡동'에 붙은 어마무시한 수식어들입니다. 정말 낭만이 넘치죠?
내 집 마련의 꿈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정부는 5억 원 미만 신축빌라 소유자를 '무주택자'로 인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버젓이 주택이 있는데, 하루 아침에 주택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된 거죠. '한 번도 유주택자인 적 없는 것처럼' 또 한 번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 가족의 짠내나는 일상을 들려드릴게요.
화곡동 빌라 501호의 하루, 시작합니다.
우리 엄마의 살림 방식은 나와 정반대다.
어떤 물건이든 눈에 잘 보여야 한다는 엄마의 철학은 '심플 is 베스트'를 신봉하는 나와 매번 충돌한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에게 정리는 삶의 방식이자 자존심이다. '회사 내부 사정으로' 언제든 바로 짐을 싸야 하기에, 책상 위에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아 쎄이, 그만둬!" 하면 "유 쎄이, 예썰" 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발을 빼야 하니까. 회사에 다니지만 다니지 않는 것처럼,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은 것처럼 애매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하루살이 같은 내 인생과 달리, 39년 차 주부인 엄마는 오늘도 진열 욕구에 불탄다. 엄마가 정성껏 꺼내놓은 물건들을 찬장과 서랍에 끼워 맞추다가 결국 '테트리스 만렙'을 찍고야 만다. 하지만 도저히 어디에도 넣을 수 없는 난이도 최상 블록이 있으니, 바로 '상자'다.
빳빳해서 쉽게 찌그러지지 않고, 코팅까지 완벽한 상자들. 어디서 왔는지 출신까지 대문짝만 하게 적힌 상자들은 우리 집에 오면 수납장으로 전직한다. 엄마는 종이 상자를 마치 보석함처럼 다루고, 아빠에겐 급할 때 꺼내 쓰는 구급약 같은 존재. 반품의 여왕인 동생에게도 필수템이다. 물건이 눈에 보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상자들을 겹겹이 쌓아 굳이굳이 베란다에 모셔둔다. 심지어 우리집 강아지 꿍이는 산책하다가 택배 차만 보이면 꼬리를 흔들기까지 한다. 우리 가족은 마치 상자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같다.
상자만큼이나 존재감 뿜뿜하는 또 다른 주방의 강자, 다회용 플라스틱 용기도 빠질 수 없다. 원래는 짜장면이나 족발, 떡볶이를 담는 배달 용기였지만, 우리 집 주방에선 전혀 다른 쓰임새로 재탄생한다. 요즘 배달 용기는 검정이나 흰색의 깔끔한 디자인으로 어떤 음식도 잘 받쳐준다.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너무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저녁 식사 담당인 나는 힘든 하루를 보냈을 가족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깨끗이 씻어둔 배달 용기에 플레이팅 한다. 저녁 8시, 온 가족이 식탁 앞에 둘러앉아 온기를 나누는 시간. 이 순간만큼은 다회용 배달 용기가 40만 원 넘는 에르메스 접시보다 훨씬 더 대단한 역할을 해낸다.
언젠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진짜 이루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여전히 이런 기억들로 가득한 살림을 할 것 같다. 누군가는 궁상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 가족에겐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증거였으니까.
오늘도 화곡동 빌라 501호에서, 천국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만의 낙원'에 가까운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