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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Jun 06. 2023

농담, 독서록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https://brunch.co.kr/@gnugeun/75)에 이어 다시 한번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20166

 작가를 모르고 읽었어도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문체는 물론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뉜 과거 체코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여러 남녀의 사랑이 주된 플롯이라는 점도, 그들의 사랑이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점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슷하다.


내용 요약

 해학이나 아이러니를 용인하지 않는 금욕적이고 장엄하며 강제적인 공산주의식 기쁨의 시대가 도래한 체코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의 무관심에 상처를 받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 주인공 루드비크는, 위기를 벗어나고자 누구보다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친구에게 의지하지만 잔인하게 외면당한 뒤 삶 전체가 송두리째 뽑혀서 거꾸로 꽂히는 시련을 겪으며 철저하게 망가진다. 그 간난신고한 삶에 각자의 욕망과 상처로 서로 얽히고설킨 여러 남녀의 파란만장한 사연이 얹히면서 누구 하나 온전히 행복하지 않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루드비크와 루치에, 헬레나, 코스트카, 야로슬라프 등 주요 등장인물의 사연이 머리에 어느 정도 들어오고 나면 그때부터는 손에서 책을 놓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흥미진진해진다. 등장인물들은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에 휘말리며 그 과정에서 평생 잊지 못할 감정을 겪고 상처를 받지만 아무도 감정을 소화하고 상처를 치유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소화되지 못한 감정은 충동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치유받지 못한 상처는 공격적인 방어기제로 나타나 끊임없이 주위와 갈등을 형성하고 대인 관계를 망가트리며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작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각 인물의 이야기를 한 번씩 돌아가면서 서술하는데 등장인물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사건 전개 속도도 빨라서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개인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사회적인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회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면, 밀란 쿤데라는 사회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물론 아직 두 권 읽은 게 다이지만).

 이번 책에서는 아직 미성숙하고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끓어오르는 본능과, 마치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지는 사회 지배 사상을 따르고자 하는 이성 모두의 영향을 받으며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감정을 품고 언행으로 발현하며 주위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천부적인 감각으로 다뤘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 같은 인간 사회가 실은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젊은이들과 그런 젊은이들이 늙어서 된 늙은이들이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읽다 보면 소심하고 비뚤어져 있어서 남에게 최대한 감추고 살았던 내 언행의 기제를 작가가 적나라하게 파헤쳐 내는 바람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이 책의 주요 갈등은 주인공은 물론 독자에게도 전혀 시원하지 않은 방식과 형태로 봉합된다. 이것을 봉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현실 세계에서 대부분의 갈등은 이런 식으로 봉합된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가슴에 남은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초라함을 꼽겠다. 시간의 물결은 평생 복수를 꿈꾸며 살아왔던 원수와 자신이 세대의 변화 앞에선 별반 다를 게 없는 초록동색 수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긴 고생과 방황 끝에 가까스로 찾은 위로의 시간과 장소에 '멍청하기 짝이 없도록 사내답고, 오만방자하게 상스러운' 술 취한 젊은 남녀 무리를 사정없이 밀어 넣은 뒤 심근경색까지 선물한다. 조금씩 젊음을 잃어가며 자리에서 밀려나는 한 세대의 모습을 너무도 현실적으로 잘 표현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의 흐름 앞에서 순식간에 하찮은 것으로 변하는 모습을 통해 결국 누구도 초라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의 물결이 파도처럼 덮쳐 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 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 가겠는가.


 이처럼 우리의 존재는 드넓은 세상과 영겁의 시간 속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피와 땀과 눈물과 인생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초라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멈출 수 없다. 인류는 끊임없이 세대를 교체하며 바뀐 환경에 적응해서 영원히 존속할 수 있겠지만 나라는 한 개인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를 이루는 구성원이지만 분명 전체 그 자체는 아닌 우리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모든 화해의 기회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였다. 어쨌거나 나는 영원성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지독하게 매운 농담이다. 매운맛 인생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적극 추천한다. 한 번 맛보면 온 얼굴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다고 하더라도 멈추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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