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실직하고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 등을 일삼던 아비란 자가 합의이혼을 하기로 한 다음날 중학생, 부인, 초등학생 아들을 차례로 죽이고는 자신의 이중인격이 한 짓이라고 얘기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알고리즘이 보여준 기사라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그의 범행을 낱낱이 알린 건 큰 아들의 핸드폰. 죽음의 과정에서 발견되기까지 15시간이 녹음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죽는 순간, 아비란 자의 섬뜩한 언행까지 고스란히. 녹음을 다시 듣는 조사관들의 정신건강도 걱정되던.. 큰 아들은 그 전에도 아비란 자의 폭행을 녹음해 왔고 죽이고 싶다는 표현을 했다는데. 아이의 공포와 연이어 죽어갔을 가족들들의 절망 같은 것들이 계속 생각나 가슴이 답답했다.
기사를 읽은 다음날 깨기 전 기억나는 꿈은 백화점에서 엄청 컬러풀한 명품 옷을 지불하지 않고 그냥 가져왔다가 돌려주려고 하니 그게 더 일이 꼬이는 그런 꿈이었다. 내용은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정말 꿈에서 쩔쩔맸다. 차라리 옷을 돌려주러 가지 말걸. 돈을 먼저 받고 마감을 못 지키는 일 탓인가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리려 하지 말라는 은유인가 모르겠는 꿈. 찝찝한 느낌에 괜히 아이랑 외출하기 전에 문이 잠긴지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나갔다.
가끔 제멋대로 켜지곤 하는 가습기가 켜져 있었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다용도실이며 집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싶은, 아니 확인하기 무서운. 나이들어 이런 기분은 사이언스라는데 싶어 샤워하러 갈 때에도 좀 뾰족한 가위 하나와 핸드폰을 챙겨 들어갔다. 낯선 사람도 낯선 사람이지만 낯익은 사람이 튀어나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까지 오만 시나리오를 써 가며.
이런 느낌은 혼자 서울 살 때 가끔 느끼곤 했었다. 영화의 소재로 가끔 나와 보고 나면 한없이 집이 낯설고 무서워지는, 그리고 영화보다 더 무서운 실화들. 남자들은 이런 두려움이 없을까 궁금함도 생기고. 아니 어릴적에도 죽음이 무서워 괜히 언니 몸에 손가락 하나 대고는 잠들기도 했었지.
낯선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1년에 살인강도 한 번 안 일어나는 동네에 살면서는 잊고 살았던 느낌이었다. 애아빠가 낯설어지면서 생겼던 공포와 긴장과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십수년은 아이 덕분에 밤이 두렵지 않겠다 안도하면서도 그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문득 걱정이 되었다가. (동물을 키우거나 공유주거를 해야지) 혼자 산 뒤로 잠금장치가 엄청 많이 붙은 엄마집도 생각 났다가. 만날 뒤숭숭한 뉴스나 카더라 드라마를 들려주며 아무도 믿지 말라는 우리 엄마, 혼자 살면서 얼마나 무서운 날이 많았을까. 더없이 편안하던 내 집에 자꾸 이런 기분이 들면 어떡하지...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4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다. 다음날이 되자 다행히 그 찝찝하던 기분은 없어졌다. 하지만 실체없는 또는 실체 있는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많겠지. 아이. 여자. 약자.. 아니 어쩌면 강자도?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대사처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의지가 된다. 나에겐 이게 직방이다. 영화에선 강아지였는데 나에겐 아이다. 아이는 내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기분좋게 재잘거려 주었고 실컷 놀고는 곯아떨어진 아이의 숨소리와 체온이 내 날카로운 기분을 계속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있기에 감정으로서가 아닌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게 되기도 하고. 혼자 살 적에는 18년 동안 내 곁을 지켜주었던 고양이들의 골골골과 꼬순내, 살갗을 뜯는 꾹꾹질, 입속에 들어오는 잔털 같은 것 덕분에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난 것 같다. 연인이나 배우자는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움과 두려움을 주기도 했기에 지금으로선 선택지에 없.
아이와 최근에 읽은 그림책 중에 앤써니 브라운의 '겁쟁이 빌리 silly billy'가 생각났다. 온갖 걱정들을 생각하곤 잠못드는 빌리에게 할머니는 "바보같은 게 아니란다. 상상을 많이 하는 거지."라고 걱정인형을 선물해 주었다. 걱정인형들에게 걱정을 맡긴 것조차 미안해져서 빌리는 다시 그 걱정인형들을 위한 걱정인형들을 만들어주었지. 예민함과 상상력, 공감이 클수록 두려움도 커지는 건지도.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은 두려움, 자책, 부정적인 감정을 오히려 즐긴다고 하는데 그래서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인가? 에니어그램에서 성격유형은 결국 근원의 두려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데. 내 경우에는 겁의 대상보다 겁 자체에 대해 생각하면 오히려 좀 나아지는 거 같다.
다른 종류의 무서움에 대처하는 방법은 소리다. 일주일전 한밤에 체해서 혼자 토하고 널부러졌을 때. 어지럽고 잠은 안 오는데 눈도 뜨기 싫고 머릿속에선 단둘인 우리가족에 대한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때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여둘톡)'을 틀었다. 한밤의 라디오는 혼자 진행해서 내 생각이 많아지고, 클럽하우스는 너무 산만하고 집중이 잘 안되고, 여둘톡은 좋아하는 취향의 작가 둘이 수다떠는 것을 눈 감고 듣고 있자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이내 긴장이 풀어져서 눈 감은 채 좀 키득거리기도 했다가 이내 다 듣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책읽아웃 정도까지만 챙겨듣는다. 음악이라면 여둘톡에서 말했던 Max Richter의 SLEEP 정도가 좋은 것 같다. 자연의 소리 asmr도 좋아하고 명상앱 calm도 다운받아서 명상음악도 들어봤지만 나에겐 SLEEP이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