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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18. 2019

나는 그 아이와 잤어야 했다

누나와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어

나는 그 아이와 잤어야 했다

누나와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어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던 떨림을 가진 그 아이와 잤어야 했다
열람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기척을 확인하며 공부했던
수많은 새벽을  일없이 보내는 동안,
서로에 대한 동경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잤어야 했다

빈 열람실 책상 위에
그 아이 신발장 안에
남몰래 남겨놓은 쪽지들과 간식들에는
미래의 언젠가에 대한 약속 같은 것도 담겨있었다

재수 생활을 끝내고
내가 다니던 대학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서는
공부하고 있던 내 앞에 기적같이 앉아 땀범벅의 미소를 지어 보인 봄날,
나는 그 아이를 학교 앞 찻집으로 데려갈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때, 잤어야 했다

처음 손을 잡고 걷던 날
아기 같이 보드라운 피부의 그 애 손이 아직 기억나는 것을 보면
웃을 때 보이던 잇몸과 야무지게 올라간 입꼬리나
눈이 마주칠 때의 설렘과
차가운 겨울밤 호숫가 공원에서 나눈 입맞춤 같은 것들이
이렇게 생생하게 남은 것을 보면

나의 처음이

간절함과

설렘과

조심스러움과
견딜 수 없는 마음들로 가득했을 텐데
그 아이 손길 스쳐 가는 길 모두가
꽃, 봉우리 터뜨리듯 팡팡 터져서는
말 그대로의 청춘이 활짝 피었을 텐데
그 아이와 잤다면

다시 오지 않을 청춘
있지도 않았던 청춘이
용기는 없고 생각만 많았던 내 탓인 것 같아
나의 그날들에도 미안하고
그 아이의 그날들에도 미안

젊은 도나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었던
두려움이
나에게는 없고 도나에게는 있었던
용기가

나는 그 아이와 잤어야 했다



*도나; 영화 맘마미아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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