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4)쓰쿠루에게 부러운 것, 사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며 쓰는 글
by Om asatoma Jul 12. 2020
쓰쿠루에게 부러운 것 두 번째는 사라.
쓰쿠루의 역사를,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라.
나는 참 많이도 헤매었다고 나를 표현하는데, 그동안은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확정하지 못했다. 사라 같은 존재를 찾아온 것이 아닐까. 아직은 둘의 관계를 잘 모르겠다. 적어도 3장까지에 나와있는 둘의 관계를 보면, 서너 번의 데이트를 하고 한 번의 섹스를 한 후이고, 사라는 열성적으로 쓰쿠루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사라는 서른여덟, 쓰쿠루는 서른여섯의 시점.
나는 이야기를 무척 잘 들어주는 편이다. 리액션이 좋다. 매우 집중한다. 상대의 이야기에 빨려 들 듯이 몰입하는데, 눈빛도 매우 빛나고 있으며 표정으로도 상대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때맞추어 적당한 단어로 이끌어주기도 하고, 중간중간의 추임새들이 내가 생각키에는 아주 훌륭하다.
그런데 이것이 겉으로만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어디로도 새지 못하게 할 듯이 모두 집어삼키며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듣는다. 그가 열심히 살아낸 어느 순간을 나를 위해 내 앞에서 다시 펼치고 있으므로 그것은 어떤 선물보다 값지다는 생각이다. 선물의 포장을 벗길 때의 고마움과 감탄과 거의 동일할 만큼의 감정의 농도로 경청한다. 물론, 주로 호감이 있는 이성의 이야기에(만).
그래서인지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십 대 중후반 한창 선을 보고 다닐 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가족사에 대하여 펼치거나 스스로 자살을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펼치면서 자신들이 이런 이야기를 어쩌다가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는 없지만 어쩌다 만나게 되는 남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게 풀어놓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가 말수가 많지 않기도 하지만 그만큼 잘 들어줘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거의 없음은 그들의 탓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코 그들이 마음이 넓지 않다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경청의 자세가 안 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받아줄 만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막연히 기다렸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스스로 나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알맞은 표현으로 재구성하지도 못했을 때다. 지금쯤이 되면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발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는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러니까 그때는 내가 말할 준비가 안 되었던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맨 것 같지만 실상은 나 스스로 나의 이야기를 인정하게 될 때까지,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내 입으로 나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나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친 후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세상에 대해 공표하듯 발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 스스로를 알지도 못했고, 나의 삶을 받아들이지도 못했으니 어쩌면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쯤서부터 기회를 엿보기는 했다. 설사 그에게는 관심이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고백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겼다. 이제 내 몸 밖으로 좀 나가버렸으면 하는 것들, 더 이상 내 안에서 살지 말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들. 사실은 전 생애를 걸고 나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친 너무나 크고 무거운 이야기지만, 별거 아닌 듯이, 가볍게, 툭, 놓아버리고 싶다. 그러면 그 정도의 무게로 변해버릴 것 같다.
이제 나는 준비가 되었고, 내가 입으로 내는 소리들을 한 번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가 올 듯 말 듯하다. 어떤 위로도 감탄도 감정적인 어떤 대구도 바라지 않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오기를.
이런 독후감은 없을 텐데 독서과정錄이라고 성격을 말하길 잘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