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m asatoma Jul 23. 2020
왜, 저번에 속옷을 한 번 사야겠다고 했잖아. 제삿날 앞두고 정성스럽게 제수 마련하듯이. 예쁜 우산 사고 비 오는 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야. 미안해, 이렇게밖에 비유를 못하겠어. 올블랙만으로도 화려했던 적 있었는데 이젠 뭐, 모르겠더라고. 레이스는 너무 부인 느낌 나고, 호피무늬를 따라갈 만큼의 에너지는 없고, 단색은 초라해 보이고, 그렇다고 작정하고 초커 브라에 가터벨트 같은 걸 하고 나타날 수는 없잖아. 웨딩 세트로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차라리 노브라 노팬티가 낫지 않겠냐고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흘렀는데 이젠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니까. 사놓기만 해도 그 사람 만날 때까지 기분이 막 좋을 것 같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는데.
정말이라니까, 뭐, 내 사고나 가치관이 바뀐 게 아니라, 내 몸이 바뀌니까 자연스럽게 생각이 달라지더라니까. 어떤 비장한 결심 같은 걸 한 게 아니라구. 내 생각은 전과 달라질 이유가 없어. 그럴 계기도 없었고.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어. 야,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게 이렇게 건전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니까.
아니야, 그 사람이 실수한 건 없어. 그 나이에 그 정도 피지컬이면 훌륭하지. 운동도 아마 계속할 걸? 축구라니 얼마나 야성적인 운동이냐? 목표물만 보며 들판을 뛰는 하이에나, 근데 또 지킬 건 지키면서 뛴다는 말이지. 마구 달려들어도 되는데, 룰 같은 건 또 확고하더라고. 그 목소리와 그 눈빛이 어디 가겠니? 아마 여전히 근사할 거야. 그건 의심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쪽 뭔가 잘못했다거나 변화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아. 아, 말하다 보니 진짜 딱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
그래, 마음이 변한 건 아니야. 아니, 마음이 변했다고 해야 하나.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지. 그래, 변함이 없어. 여전히.. 여전히 그래. 그래. 보고 싶어. 차리리 투명인간이 되어서 그 사람 옆에서 그 사람 한 번 보고 싶어. 밥 먹는 모습, 샤워하는 거, 일할 때는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하고, 운전할 때의 표정, 책 읽을 때 문장을 응시하는 거, 졸릴 때 하품하는 거, 심지어는 화장실에서의 모습도! 그리고 한걸음 더 가까이에서 체취도 맡고 싶어. 향수도 겨우 느껴지는 거리 말고 말이야. 조금만 더 가까이서 숨소리도 듣고 싶고. 그러니까 내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란 말이지.
뭐가 문제냐고? 문제가 사라진 게 문제인 거지. 그 사람을 언제 보나, 봐도 되는 건가, 만나면 어디서 만나는가 하는 그런 문제들이 말끔히 사라졌어. 맞아,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어. 그렇다니까, 몸이 먼저 반응한 거라니까. 물론 좀 다른 의미에서의 몸의 반응이지만 말이야. 이제 좀 슬픈 이야기야.
하지만 이건 어떤 계시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나는 이번에 인간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되었거든. 너 그거 아니? 정신적인 스트레스들, 심리적인 문제들이 쌓여가면 그게 신체화되어서 나타난다는 거. 그러니까 이유 없이 배가 아프다거나, 어깨 한쪽에 문제가 있다거나, 허리가 아프다거나, 뭐 그런 신경성 질환들 있잖아. 그걸 신체화가 진행된다고 우린 표현하거든.
뭐, 내 옆구리 살이 그래서 고개를 내밀었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내 몸이, 내 살들이 알아차린 거지. 우리 주인이 지금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구나, 이대로 두었다가는 가꾸어놓은 가정도, 이루어낸 사회적인 성취들도 흔들릴 만큼 어떤 스캔들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우리 주인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나 말고, 내 몸이.
야 내 몸매가 몇십 년이나 변함없이 유지가 되어왔는데, 식습관도 변하지 않았고, 그것 말고는 설명될 길이 없어. 나라는 인간도 매력적인데 몸까지 그러니까 이건 너무 치명적였던 게지. 하하. 나중에는 막 벗고 싶어 지더라니까. 내가 운동이 좋아서 수영을 한 게 아니야. 벗을 데가 없어서 합법적으로 벗으려고 한 거지. 아무튼 그날 샤워하다가 문득 옆구리에 뭔가가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걸 보니까, 문제가 말끔히 사라져 버렸어.
사실, 이게 잘 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그치만 하늘이 보우하신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음.. 나 그 호텔 전망 좋은 객실이 몇 호인지까지 알아뒀다니까. 세상 아주머니들의 뱃살은 가정을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분들의 뱃살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더라고.
맞아, 나 옆구리에 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변명을 이렇게 정성 들여서 하고 있는 거야. 우리 시어머니 아들 차 글로브 박스에 부부화합이라고 써 놓은 봉투 안에 부적 넣어놓으셨던데 그거 보고 마음이 짠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강력하지는 않았거든. 이건 뭐 러브핸들이 괜히 러브핸들이 아니라니까. 현재 법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솟아 나온 핸들이라는 거 아니겠냐.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또 한편으로는 아쉽고 그래. 뭐 제대로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나나 싶어서.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는 건가. 암튼 그래. 근데 너 저번에 먹었다는 그 약 효과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