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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들어왔다

by Om asatoma

진료실로 들어온 여자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위험해 보였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내담자들을 보게 되는데, 전공한 지 이십 년을 향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한눈에 봐도 그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대략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눈빛, 걸음걸이, 머릿결, 호흡의 깊이만 봐도 마음의 병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대략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긴장해있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 그쪽도 나에 대한 신뢰도를 평가하는 듯했다. 지나치게 다정한 눈빛이라든가, 당신의 모든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듯한 감상적인 인상은 오히려 진료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차라리 적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편이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관계의 유지뿐만 아니라 치료에도 도움이 되었다.


의자에 앉은 여자의 시선이 내 손톱에 머물렀다. 여기저기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상담 프로그램도 많이 경험한 환자들은 강박이 있냐며 알은체를 하기도 한다. 여자는 지금 바싹 깎아놓은 내 손톱에서 무엇을 읽고 있는 걸까. 옅은 미소 같은 것이 입가에 잠시 스치더니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다.


여자는 어느 시점에서 정지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아이들 중에는 이혼의 시점에 성장이 멈춰서 청소년기가 되어서도 혀 짧은 소리를 낸다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적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가장 좋았던 때 머물러 있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환경을 둘러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를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여자의 목걸이와 시계. 전체적인 스타일을 보았을 때 꾸미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그 목에 있는 목걸이는 십 년 전에 여자의 목에 걸린 이후로 단 한 번도 벗어진 적이 없어 보였다. 어느 옷에나 어울릴만한 얇은 줄에 작은 큐빅 하나만 덩그러니 끼워진 모양이어서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 말은 어떤 옷을 입더라도 그곳에 그대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십 대 후반쯤에는 어울렸을지 모르겠으나 여자의 지금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걸로 봐서 어쩌면 여자는 지금 자신의 목에 목걸이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낼 가능성이 높다.


손목에 시계가 있는 것은 의외였다. 이쯤 되면 시계가 멈추어도 그것을 수리하기보다는 시계 없이 다닐 정도였고, 시간이 흐르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생활할 정도로 보였기 문이다. 무광 메탈 밴드로 된 손목시계이고 원형의 바젤 안에는 블랙 다이얼 위로 다이아몬드가 세팅되어있는 차분한 느낌의 시계였다. 단종된 지 몇 년이 지난 걸로 알고 있다. 분침과 초침이 멈춘다고 해서 그것을 들고 수선을 맡기러 가는 여자가 상상되지 않는다. 그만큼의 에너지도 없어 보였다. 업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에너지가 약해보이기는 해도 타고난 품격이 느껴진 것은 여자의 자세에 있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몰락한 귀족 같았다. 이미 황폐해진 정원이어도 다듬어지지 않은 채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수종을 보면 이전의 싱그러운 정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뱅갈 고무나무 같은 단순함과 여유로움이 과거의 언젠가는 그녀에게 흘렀을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지 않는 듯한 인상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으니 특별한 점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책상에 앉아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은 자칫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눈을 한 번 맞추고는 모니터나 책상 위 자료를 살피는 척을 하고 의자에 앉으면 다시 시선을 맞추고 인사를 한다. 이때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여자는 달랐다. 단 한 번의 시선의 회피 없이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딸아이가 웃지 않는다고 해서요.

엄마는 왜 웃지 않냐고 물었어요.


마치 준비해온 말처럼 오디션 무대에서의 연극배우 지망생같이 과장되었지만 자연스러운 문장이 흘러나왔다.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 약간의 틈은 있었지만 그 시간까지도 미리 계산된 듯이 자연스럽게 발화되었다.


딸아이가 웃지 않는다고 해서요. 중간에 한 번의 쉼도 없이 하나의 호흡으로 대사를 했다. 표정의 변화도 없었으며 눈의 깜박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지된 석고상이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시선은 내게로 멈춰져 있었으나 다시 생각하니 허공을 보고 말한 것도 같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장을 하면서는 좀 달랐다. 엄마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어떤 복잡한 것이 담기나 보다. 그 두음 절로 된 단어를 발음하면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다잡는 것이 보였고 그 문장이 끝날 때까지도 잘 유지하고 있었으나 문장을 마친 다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두 문장만 준비해 왔거나 아니면 뒷 문장은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오디션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우는 걸까,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미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해졌는데. 말이라는 것이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그 마음만 잘 전해지면 되는 거 아닌가. 오해와 곡해야말로 삶이라는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가 아닌가.

..

..


포기하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때 포기했어야 했다. 상담 의뢰서를 써 드릴 테니 옆 건물에 있는 상담소 부소장을 찾아가 보라고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렇게 될 거였다면. 예상가능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지만 생각보다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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