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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Mar 22. 2024

제주 3 : 不純과 不穩의 유네스코 지정 자연유산

어리목으로부터 영실

우리를 어리목으로 데려다준 택시기사가 그랬다.

가장 비수기인,

'이도저도 아닌' 시기에 한라산에 왔다고.



어리목 초입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깊은 숲 속 같은 이색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 속

한 걸음 한 걸음 오르자 이내 숨이 차더니

귀에서 심장이 뛰는 듯했고

이 심장의 소리가 나의 심장 아닌 누구의 심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칠 때쯤

나는 나의 호흡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거칠고 때로 얕게 다시 얕게, 깊게, 거칠고, 거칠게, 몰아쉬다가

급기야 吟까지 나오는 걸 다급히 거두어들이고

겨우 누르고 누르며 호흡으로 숨소리로 뱉어내고 있는데

오르는 구간이 길어지자 나의 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평일 오전 인적 없는 깊은 한라산에

새소리와 制하지 못하는 나의 숨소리와

그에 비하면 그래도 점잖은 그의 숨소리와

트래킹화가 바닥에 닿는 소리들 위로 아침 햇살이 내리고

더이상 참지 못하는 신음이 간간이 섞여들 때

그와 나란히 앉게되었는데

덜큰한 그의 땀냄새를 맡고

잦아드는 그의 숨소리를 듣고

나는 그만 그의 얼굴과 그의 목에 흐르는 땀방울을 보고 말았고

일정한 거리에 있음에도 그 몸의 열기가 느껴져

아주 잠시 눈을 감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는 것 같았고

윗세오름에 이를 때까지 그의 숨소리만 들렸는데

다행히,

그는 뒤돌아 보는 일이 없었으며

내가 알아차릴 만큼의 속도를 맞추기 위한 노골적인 노력도 없었으며

감사히,

영실로 내려오는 가파른 경사의 수많은 계단과 깎아지른 높이감으로 몸을 휘청였던 많은 순간에도 내 가까이 위치하지 않아 손이라도 잡아 부축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애당초 일어나지 않게 도와주었고

직접적인 부축 없이 근처에 있음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주었고


계단을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오른 무릎의 통증과

왼발 발가락의 통증에만 집중할 수 있게

이렇게 아프지만 스스로 감당해야 함을 인식할 수 있게

포기하고 싶어 주저앉아 울고 싶지만

그럴 여유도 없음을 상기할 수 있게

다시는 탐방로 초입의 불순하고 불온한 생각이 들지 않게 도와주었는데


이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뜰 때까지

감정 없는 가느다란 눈물만 흐르고

멈추어 기다리거나 뒤돌아보지 않아도 좋으니

어느 산이라도 다시 한번 함께

거칠게 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구간이 조금만 더 긴 산에서

숨이 찰 때 조금만 더 가까이 앉아 숨이 잦아들 때까지 조금만 더 오래 있기만 해도

멈추어 기다리거나 뒤돌아보지 않아도 좋으니

숨이 찰 때 나란히 쉬는 것만 해도

모르는 사람들 하나의 벤치에 앉아 쉬듯이 말뚱히 앉아 있는다 해도

그래도


그래도.




마찬가지로 등산객이 드물고 산짐승이나 산새소리만 들리는 산에서

'이도저도 아닌' 사람

''

그렇게 한 번만 더.

한번 더.



.

숙소로 돌아와 보니

내 무릎으로는 평지 보행도 힘들었고

두꺼운 양말이 피범벅이 되어 번져있었다

.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파도 참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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