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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30. 2019

만나서, 만지고 싶어.

그게 전부야.

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기다리게 만드는 네가 야속하기도 했다가 차라리 잘 되었다고 단념도 했었는데, 문득 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에게 할 말이 생겼거든. 혼자 하는 말이긴 한데, 누가 들어줬으면 좋겠고,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면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야. 네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너로 인해 생긴 변화에 관한 이야기니까 네가 가장 잘 들어줄 것 같아서. 그래, 사실 너 말고는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기도 해.


가을에 만나자고 한 건 나지만, 가을이 온 지는 한참이 지났는데 흔적만 사라지네. 그 여름, 태풍이 올 것 같았어. 잠시의 소나기도 작은 틈 사이로 들이쳐서는 흠뻑 적셔놓은 것을 확인하고는 덜컥 겁이 났어. 이러다 큰일이 나겠다고, 그렇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겠다고.


한여름의 열기가 식을 시간이 필요했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다가 내 몸 안에서만 모든 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어느새 지치더라. 그렇게 지쳐갈 시간이 필요했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너도 나도 미혼일 때보다 나는 많이 용감해져 있었으니까, 일을 낼 법도 했지. 다행히 너는 동의해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어.


미안하지만 너의 변화는 나에게 중요하지가 않아. 너에게 어떤 감정의 변화가 생겼을까를 생각하기에는 삶이 그럭저럭 살아지지 않는 피곤한 마흔이잖니. 처음부터 네가 무슨 생각으로-처음 만난 지 12년 만에, 마지막으로 만난진 9년 만에, 하지만 그 사이에도 실제로 얼굴을 본 일이 서너 번밖에 없는 나에게 연락을 했는지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어. 궁금해한다고 알 수도 없는 것이고, 너의 답을 들어도 그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고, 진심을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


너에게 나는 뭘까를 궁금해해도 되는지를 모르겠어. 대신 너는 나에게 뭘까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어. 맞아, 탐구에 가까울 만큼 나는 집중해서 분석했어. 그랬더니 내 삶의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는 어렸고, 자신감 없는 아가씨였지. 남들은 다들 밝고 화려하게 봤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어둡고 작게만 느껴졌었는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사랑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기까지, 네가 나의 결혼과 출산을 도왔어. 네가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결혼을 결심했고, 출산을 결심했으니까. 이제 사랑할 거라고 네게 말하는 건, 그 대상이 네가 아니어서 가능한 일이야. 선택지 안에 네가 있다면 아마, 말하지 못하겠지. 사람의 앞 일이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자, 나는 언제 너에게 연락을 할까. 어디서 만나 무엇부터 이야기하게 될까.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네가 내 손을 잡아 준 것을 잊지 못해 만나자고 하는 걸 지도 몰라. 십 년 가까이 본 적 없는 남자가, 게다가 과거에 연인 사이도 아니었던 연애를 했던 사이도 아닌 남자가 잡는 손을 거두지 않았던 내가 신기어. 바깥은 여름이 한창인데 정지된 듯한 한낮 카페구석에서 네가 손을 뻗어 내 오른 볼을 만질 때 나도 모르게 네 손위로 내 얼굴이 기울던 그 잠깐의 순간을 잊지 못해. 그때 나의 반응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거든. 완전한 본능이었다고 생각해. 강아지들 고양이들처럼, 그저 좋다고 발라당 몸을 맡겨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받고 싶은 본능. 나는 그 장면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어.  


말이 좋을까, 글이 좋을까.


그냥 글로 남기고 만나서는 손이나 잡고 싶다. 적당히 바람이 불면 입이라도 맞추고, 너의 눈빛을 보고 싶고, 음성을 듣고 싶어. 그래, 사실은 이게 전부야. 만나서 만지고 싶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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