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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Apr 01. 2024

제주 11: 무라카미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책을 제주에 가기 직전 마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3장 정도까지도 겨우 읽고 아무리 하루키의 책이지만 완독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단념한 채 아침 비행기를 탔다. 다녀와서 반납할 생각이었다.


일행보다 네 시간쯤 이른 시간에 출발한 것은 제주에서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함께도 좋지만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잠시라도 원했다. 거울 속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을 어려워하는 나는 미술관을 택했다. 거울을 대신하여 내 모습을, 나의 무엇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행선지는 제주도립미술관이 되었다.


인도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땅의 신성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한다. 하와이도 그렇다고 들었다. 인도와 하와이의 기운을 느껴보지 못한 나는 제주 땅에서 그와 같은 어렴풋한 기운을 느낀다. 특히 제주의 오름과 숲길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며 창밖의  숲을 보고 하루키가 문득 떠올랐다. 읽지 못한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숲길을 달리니 왜인지 하루키를 생각하게 돼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말하는 게 마치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말처럼 어떤 면에서는 식상하고 뻔하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말처럼 느껴져서 발화하지는 않고 얼른 삼켰다.


나는 하루키를 늦게 알았다. 아일랜드에서 지냈던 친구가 싸이월드에 올린 사진 속 책상 위에 상실의 숲 책이 놓여 있는 걸 보고 따라 읽었다. 그 친구는 내게 매우 특별한 친구였다. 대학원 기숙사 시절 룸메이트 아이와 밤을 새워가며 하루키의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이도 내게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미혼일 때 1Q84를 함께 읽은 남자는 내가 결혼한 후에도 함께 영국으로 가자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제주에서 나를 따라다닌 몇 개의 주제가 있었다. 비행기에서 본, 바다 위로 비치는 구름의 그림자, 이 사람을 만날 때는 마음 놓고 웃어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 제주에서의 시간과 육지에서의 시간이 내게 다르게 다가오는 것, 이쪽과 저쪽의 경계 같은 것, 제주에서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살아가게 될 육지에서의 삶,  제주에서 발견한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의 나, 한라산 영실을 오르고 내릴 때의 모든 호흡, 사람 없는 관광지의 밤거리와 해뜨기 전의 도시, 봄날 아침의 이중섭 미술관 뜰, 햇살과 새소리와 그 모든 것들과 대비되는 육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의 공간과 시간들..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다. 마지막 날 제주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근래에 읽고 있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어김없이, 우연히 어쩌면 당연히,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다 읽은 것처럼 보였고, 또 다른 일행은 앞부분을 읽고 있는데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같은 커피예요. 나도 당신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주문했어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같은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같은 종류의 커피를 마심으로써 몸의 기억을 비슷하게 만들고 싶었다. 커피의 맛이란 아주 일부이겠지만.


완독 이유가 생겼다. 비슷한 나잇대의 사람들이 소재로 삼을만한 작가였고, 책이었다. 별스럽지 않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특별하게 생각했다. 공유하고 싶은, 나누고 싶은 마음을 확인했고, 물론 나의 일방적인, 하필 반납하려고 한 날,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어떤 계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 책에 대한 단독 글이 아닌, 제주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카테고리에 넣는다.


돌아와 한동안은 제주의 기억을 잊을까 봐 메모를 했고, 그를 만나기 전에 완독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몰아 읽었다. 1부가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뭔가가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전체의 흐름에서 조금은 도드라지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게 되었다.


작가의 근작이라고 알고 있는데 책의 내용은 어딘가 젊은 또는 어린 느낌이었고 습작이나 처녀작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몇 부분있었다. 오래전에 쓴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쓴 글이라는 작가의 말을 보고는 이해가 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싶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음악을 듣고 싶다는 것은 공유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는 것,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싶은 것, 나를 말하고 싶은 것, 그리고 함께가 허용되는 범위. 허용되는 범위 내의 무엇이든...


나중의 기억을 위해 몇 문장 필사를 남긴다.


104 마음이 굳어버려

110 네 것이 되고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156 깊은 무력감...... 바다 밑에 가라앉은 무거운 납 상자

191 청결한 새 옷

206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206 얼마든지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 테니.

210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 한번 공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그걸 극복하기란 간단치 않을 테니까.

211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30 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235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무겁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나는 드디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관성을 얻어 차츰 전진한다...

247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 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

263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 남색 베레모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있다.

280 그곳에 혼자 서 있으면 어김없이 슬퍼졌다. 아주 오래전에 맛보았던, 깊은 슬픔이었다. 나는 그 슬픔을 무척 잘 기억했다.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또한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지도 않는 종류의 깊은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남기고 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325 시공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뒤섞인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경계의 일부가 무너지고, 혹은 모호해지고, 현실이 여기저기 뒤섞이기 시작한다.

358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성경, 시편)...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361 우리는 한정된 시간 안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404 마치 바뀐 옷차림을 계기로 다른 인격으로 갈아탄 것처럼.


405 지금까지의 인생과 결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베레모와 스커트)

495 내 주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막연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떤 힘에 의해 어딘가로 조금씩 이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535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氣球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러니 매어둔 고리를 풀고 이 세계를 영원히 떠나버리는 일에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586 그 도시는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주위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억센 문지기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요. 그리고 그 도시 사람들이 풍족한 생활을 한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춥고 긴 겨울 동안 많은 짐승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죠. 그곳은 결코 낙원이 아니에요.

684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696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714 밤의 강물은 지극히 고독했다.

719.. 그래서 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건, 왜냐하면 저는 원래 당신이고, 당신은 원래 저니까요... 우리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별개의 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722 저와 하나가 됨으로써, 당신은 보다 자연스러운, 보다 본래에 가까운 당신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725 짐작컨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743 말하자면 우리는 허공에 떠있는 상태입니다.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낙하하진 않았어요. 낙하가 시작되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으면, 우리도 계속 허공에 뜬 상태를 유지합니다.

749.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그렇게 원한다면.

750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움직임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해요.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아직 그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서.

751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

752 걱정할 없어요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많은 일이 잘 풀릴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분신이 당신의 복귀를 틀림없이 든든하게 지지해 줄 겁니다.



여기까지 스크롤 하여 읽을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지면..


사실은 이쪽과 저쪽으로, 그림자와 본체로 살아가면서 둘을 합체시킬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중에 만난 책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놓아두어서는 그 둘이 처음부터 각개의 개체로 생각될만큼 어느 쪽이 진짜인지 어느쪽이 본체이고 어느쪽이 그림자인지 알아차리기 힘들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현재의 완벽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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