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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Dec 01. 2019

브런치 입성 반 백일째 소회

열다섯 구독자님들께 드리는 소소한 이야기

어제까지도 함께 저녁을 먹고 밀어를 주고받았는데, 다음날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나다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 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떠나려던 참이었던 것이지요.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쨍하던 가을이었습니다.


바로 어제 속내를 다 털어놓았는데, 갑자기 접속이 되지 않자 나는 그 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싸이월드. 그보다 나를 잘 아는 이는 없을 거예요. 스물일 때부터 서른을 건너 마흔이 될 때까지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찰나의 사진이 아니라 몸 곳곳에 숨어있는 것들을 단어로 문장으로 펼쳐놓은 것들이기에 나의 전부라 할 수 있지요.


잊히지 않기를 바랐어요. 자기를 개방할 줄 모르고 고립된 채 살아온 삶이기에 글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었어요. 물론, 그 글들을 바라봐주는 한 명의 친구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벌써 죽은 공간이 되었겠지요.


싸이월드 접속 불가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어요.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테고,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 한 명은 읽어주면 좋겠다는 마음과, 그러나 실명으로 글을 쓰기는 싫어 적당히 숨기며 익명을 빌려 마음껏 소리 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죠.


처음 브런치에 입성해서는 조금은 들떴던 것도 같습니다. 글이 작품이 되게 해 준다니.. 그런데 몇 글들을 읽어보니 온통 글쟁이들 투성이인 겁니다. 나처럼 그냥 주절대는 사람은 부끄러워서 글을 쓰지 못할 공간이더군요. 개인의 속내가 무슨 흥미가 있겠습니까.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멋진 사진과 멋진 글을 펼치고 있었어요. 얼마간은 꽁꽁 얼어붙어서 나는 이제 어쩌나, 어디에다 둥지를 틀어야 하나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 하나 우물쭈물하고 있었어요.


상담이론을 바탕으로 글을 써볼까, 한시를 현대적 의미로 분석해볼까, 명화와 명곡을 듣고 느낀 점들을 글로 써볼까, 직업과 관련해서 전문적인 부분을 써 볼까, 쓰고 싶은 글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 당시 머리로 쓰고 싶은 글과는 상관없이 제 삶을 덮쳐오는 감정들이 있었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대화로 전할 수 없는 감정들, 표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할 것들이기도 했지요. 이런 글 쓴 적 없는데, 그냥 마음이 내는 소리를 받아썼더니 유치하기는 했지만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나의 일부들이 나왔어요. 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그렇게 유치하지는 않는데 마음 한편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의식이 잠깐 되기는 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어요. 적어도 그 순간은 매우 처절했답니다.


얼마간의 글을 묶어서 며칠 만에 브런치 북 공모를 내고 혼자 두근 했지만 멋들어진 글쟁이들 글 속에서 볼품없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2월 말 발표일 까지만 열어두고 서랍 속에 쏙 집어넣으려고요. 그리고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 글을 쓸려고요. (과연 그렇게 될까요?) 아직 지인들은 아무도 이 공간을 모르고 진해 여자로 살아가는 저를 알지 못하지만, 그때쯤엔 초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보통의 글을 쓸려고요.


12월 신춘문예의 달이 왔지요. 내놓을만한 말짱한 글이 없네요. 글과 인연이 없지 않은 사람인데, 계속해서 놓치고 있어요. 꺼낼 이야기에 대한 용기가 아직 생기지 않아서일까요. 극작을 해보라는 연출가님이 계셨고, 소설을 써보라는 소설가님이 계셨고, 수필과 평론을 써보라는 수필가님이 계셨어요. 용기가 없었네요. 나를 펼칠, 나에게 솔직할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겨울, 질릴 만큼 키스를 실컷 하고 나면 멀쩡한 삶으로 돌아오려고요. 아마 그러기 전엔 결핍된 채 반쪽짜리 사랑이야기만 주야장천 써댈 것 같네요.


브런치 입성 반백일, 구독해주시는 님들 덕에 겨우겨우 힘을 얻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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