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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온 Dec 31. 2021

음악은 꼬르륵

뱃속에 꼬르륵이 사는 소녀(4)


야자를 안 하는 애들은 학원을 간다고 했다. 예체능 계열 학원을 간다고 야자를 뺐다. 부러웠다. 하고 싶은 일을 손에 쥐고 보여줄 수 있는 아이들이, 나는 손을 뒤로 숨기기 바빴다. 빈손을 어른들은 싫어했다. 뱃소리는 어떤 일에도 장벽이 되지만, 음악은 뱃소리도 묻히게 만들었다. 친구랑 만나도 노래방, 혼자도 노래방에 자주 들락거렸다. 중학생부터는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부모님한테는 비밀이었다. 슈스케도 지원했다. 1차는 전화 오디션으로 30초가량 노래를 부르면 대부분 합격하는 거였고, 2차부터가 진짜였다. 수천 만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보조경기장을 빌려서 작은 부스를 수십 개 만들고 며칠에 거쳐 전국 단위로 오디션을 봤다. 서울에 오디션을 보러 가다니! 친한 친구 두 명에게만 몰래 말했다. 

"나 슈스케 1차 합격했다!" 

친구들은 2차 오디션이 있는 서울까지 가주었다. 부스 옆, 화장실, 어디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기가 죽었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연습도 못하고 가사만 속으로 되뇌었다. 가사라도 틀리지 말아야지. 



K100~ K150 

전광판에 숫자가 떴다. 배에 붙은 K133을 쳐다보자, 목구멍이 말랐다. 주최 측에서 나눠준 생수병엔 물이 찰랑거렸다. 자리에 일어서자 졸던 친구들이 화들짝 깼다. 

"파이팅!" 

"떨지 말고 잘하고 와" 

나를 위해 서울까지 오고 지겨운 시간을 기다려준 친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잘 보고 오리라. 부스 앞에 다다르자 친구 파워가 꺼져가고 있었다. 떨렸다가, 차분한 척했다가, 손발이 차갑다가, 추웠다가, 천막이 걷히고 K132번을 붙인 사람이 아쉬운 표정으로 나왔다. 내 차례다. 천막으로 들어섰다. 



앞엔 두 심사위원이 앉아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카메라가 삼각대에 꽂혀 나를 보고 있었다. 카메라다.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자기소개해주시겠어요?" 

"네 저는 중학교 1학년 3반 34번 소녀입니다." 

싱어송라이터니, 목소리가 청아하니, 아무 수식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긴장 푸시고 준비되시면 노래 시작해주세요." 

중학생이어서 그런가 심사위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줬다. 자신감 있는 척, 준비해온 발라드곡을 시작했다. 

"사랑했죠.." 

목소리 끝이 떨렸다. 이곳이 정말 춥다. 추워서 떨리는 거다. 20초 정도 부르자 가사가 날아갔다. 

"그른 거죠.." 

발음을 씹으며 아련한 척 입을 닫았다. 두 심사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예 다른 분위기로 한 곡 더 준비해온 거 있어요?" 

지식인에선 한 곡 더 시키면 합격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라는데, 이건 좋은 징조...? 준비한 노래는 없지만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시작할게요." 

무표정과 대비되는 염소 목소리로 듀오 댄스곡을 불렀다. 

"네. 수고했어요." 


찝찝하다. 그래도 앞사람보단 길게 한 것 같다. 천막을 걷으며 나오니, K134번 스티커를 붙인 언니가 서있었다. 내 표정도 K132번이랑 비슷했겠지. 쫄쫄 굶다가 오디션이 끝나자 배가 고파왔고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었다. 실수와 약간의 기대를 넘나드는 2주였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음 슈스케 시즌에도 도전했지만 합격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더욱 마음이 조급했다. 인터넷엔 이미 나랑 같은 나이의 아이돌이 데뷔하고 있었다. 토요일, 기획사 공개 오디션을 보러 왔다. 시큰시큰한 눈알을 굴렸다. 시력이 안 좋은 탓에 4번은 압축한 무거운 안경알 대신, 처음 렌즈도 끼고 왔다. 난시가 심한 고도근시에게 맞는 공짜 렌즈가 없었다. 체험용이라고 받아온 렌즈는 흐리게, 가끔은 두 개로 겹쳐 보였다. 뵈는 게 없어야 자신 있게 오디션을 치를 수 있지 않을까? 긍정 회로를 돌리며 더듬더듬 삼성역에 왔다. 인터넷으로 접수할 수 없고, 오는 순서대로 선착순이었다. 점심이 지나면 마감이 되므로 아침 일찍부터 버스를 갈아타서 왔다. 1시간, 2시간, 줄은 천천히 줄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린 지 1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덥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에 붙은 소속 연예인들의 굿즈는 번쩍이고, 아름답고, 눈부셨다. 지망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으르르..."

오디션이라도 뱃소리는 가만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 배에서 이렇게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스-읍! 

"..." 

배를 쪼그리는 것보다 혼내는 게 더 효과가 좋았다. 꼭 살아있는 것처럼, 생수를 들이켜는데 앞 번호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손을 펴더니 마이쮸를 내밀었다.  

"배고프죠?" 

"헐, 감사합니다." 

긴긴 기다림 앞에서 같은 꿈, 같은 오디션, 비슷한 또래에 무려, 마이쮸는 절친 충분조건이었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이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다른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볼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한 기다림을 또 하겠다고?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오디션은 사람을 초라하게 했다. 조명 뒤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조명이었다. 빛나는 이를 비춰주는 조명.



캄캄한 불 아래 열 명이 줄을 맞춰 강당으로 들어섰다. 직원은 강당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영화관에 온 것 같았다. 소속 신인 걸그룹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한 인물이 두 명으로 겹쳐 보여도, 얼마나 상큼하고, 예쁜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연습생 지망생들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건가. 하지만 대부분의 연습생 지망생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다. 당분간 걸그룹은 안 만들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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