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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온 Jan 01. 2022

고등학교를 그만두다

뱃속에 꼬르륵이 사는 소녀(5)

뮤비가 끝나고, 강당 앞 단에 핀 조명이 켜졌다. 노래를 보여줄지, 춤을 보여줄 지에 따라 갈렸다. 언니는 춤, 나는 노래였다. 춤 지원자가 먼저 오디션을 봤다. 언니가 일어났다. 열 명이 모두 단에 올라가, 앞에서부터 한 사람씩 장기를 보여주고, 마지막 사람까지 끝나면 다 같이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준비해온 노래가 있는 사람은 미리 CD를 전달했고, 없는 사람들은 틀어주는 노래에 맞춰 즉흥으로 춤을 췄다. 언니는 여성 솔로 댄스곡에 맞춰 춤을 췄다. 심사위원들한테 손짓을 하며 팝핀도 추고, 웨이브도 넣었다. 30초의 짧은 노래가 끝나고, 허리가 배에 닿도록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바로 다음 참가자의 노래가 나왔다. 마지막 사람까지 끝나고 단 아래로 내려왔다. 내 차례다. 계단을 내려오는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와 손이 스쳤다. 

"나중에 또 보자."  


그랬으면 좋겠다. 언니는 문 밖으로, 나는 단 위로 올라갔다. 어떠한 감흥도 느낄 새 없이 속으로 가사를 되뇔 뿐이었다. 발라드도 아니고, 적당히 경쾌한 노래로, 듀오의 R&B 음악을 불렀다. 컴컴한 강당 의자엔 기획사 관계자로 보이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노래를 시작하고 그 사람들과 눈을 맞추려 다시 봤다. 중간 사람이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것도 좋은 징조 아닌가? 언니 우리 진짜 다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언니를 다시 보지 못했다. 티브이에서도, 오디션 장에서도. 

언니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땐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다른 오디션을 몇 개 더 봤다. 성인이 되어서도 기획사에 지원 메일을 넣었다. 어렸을 때는 다 아는 기획사를, 커서는 잘 모르는 기획사만 넣었다. 고등학생의 조급함에는 희망이 있었지만, 성인의 간절함에는 체념이 실렸다. 음악마저 꼬르륵이었다. 




어설픈 평등주의자였다. 사람들을 모두 공평하게 대하려고 했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도, 덜 친한 반 애한테 더 잘 대해주었다.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싶었다. 지나고 보면 아쉽다. 좋아하는 애한테 표현을 아끼지 말 걸, 무리에서 분위기를 올리는 편이었지만, 단짝은 없었다. 수학여행이나 당일치기 체험학습을 가면 버스 옆자리는 반에서 잘 못 어울리는 친구였다. 오지랖을 부렸다. 나와 같이, 고민하는 친구를 상담해주고 싶은 게 나를 도와주고 싶어서 남을 도왔다. 안으로 쌓이지 않으니 내어줄 것이 점점 벅찼다. 복부를 잡고 전전긍긍하는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 이야기는 다른 친구의 고민에 덮였고, 나는 입을 닫았다. 지나고 보면 꼬르륵 소리보다, 친구도, 꿈도, 어디에도 내가 없어서 불안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1학년 때, 꼬르륵 소리로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못 하고 아빠에게 자퇴의사를 밝혔지만, 바로 막혔다. 대신 일 년의 유예 기간을 받았다. 무사히 유예 기간이 끝났다. 아빠와 대화는 언제나 어렵다. 그것이 자퇴 선언이면 더더욱, 


"저 자퇴하려고요." 

아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봤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예요."

"너, 나중에 후회할 거다."

관자를 쓸어내리고, 한참을 바닥만 봤다. 자신 있는 척했지만,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


"... 그래, 알아서 해라." 

통보라 했지만, 허락이 맞았다. 

부모님한테 자퇴 동의서에 서명을 받아야 진짜 자퇴할 수 있었다. 보통 4주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성적은 모범이 아니지만, 성실한 학교 생활을 한 나는 유예 기간이 필요 없었다. (1년의 유예 기간을 지냈지만)




D-DAY

5월,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날, 학교를 관두러 간다. 국어는 잘 봤는데, 좀 아쉽게 됐다. 고등학교 생기부, 모든 성적과 활동을 어느 입시에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엄마 이따 10시에 오시면 돼요."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 똑같은 학교, 똑같은 풍경이지만 달랐다. 이젠 오고 싶어도 못 오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리웠다. 커다란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사람처럼 가슴이 쿵쿵거렸다. 같은 반이 된 지 얼마 안 된 친구에게만 자퇴 소식을 전날 말했다.

"나 내일 자퇴해."

소곤소곤 속삭이고 친구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 잘 지내." 

2학년이 되고 만난 친구였다. 친구는 혼자 다니는 걸 개의치 않아했다.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지. 메일 해"

자퇴와 동시에 핸드폰을 정지했다. 공부를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1교시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은 날 앞으로 부르셨다. 

"소녀가 오늘 자퇴한단다.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만두는 거야. 마지막으로 인사해."

아이들은 놀란 기색이었다.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데 긴장보다는 묘한 쑥스러움이 솟았다.

"잘 지내, 애들아. 음, 다들 꿈을 이루길 바란다."

자리에 돌아가 가방을 싸고 있는데, 아이들이 날 둘러쌌다. 

"진작 말해주지, 야"

"왜 자퇴하는 건데? 유학 가?"

"건강하고, 잘 지내."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실 문을 열었다.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를 나누고 교실을 나왔다. 엄마가 교무실 앞에 서있었다.

"엄마, 언제 오셨어요?"

학교에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 적이 있었나? 끝나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얼빠지고, 불쾌감도 빠지고, 소란스럽고 산뜻하다. 지금처럼 학교가 좋은 적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엄마에게 서명을 받았다. 정말 마지막이다. 담임 선생님과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셨다.

"검정고시 준비해야죠. 읽고 싶은 책도 읽을 거고요."

1층에 다다랐다. 

담임 선생님은 엄마에게 고개를 숙이셨다.

"죄송해요. 담임으로서..."

담임선생님이 우셨다. 올해 3월에 만나 한 학기도 채 못 지낸 나를 위해 우셨다. 코가 찡했지만 울지 않았다. 자퇴는 슬픈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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