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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아마존에서 만난
읽어야 사는 남자

[작가의작가]07.모험 : '정글의 법칙' 어기다간 큰 코 다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신기한 캐릭터와 신나는 모험을 즐겼다면, 이번 책은 인간 대 동물의 사투를 다룬다는 점에서 모험의 결이 다르다.  장난인데 수준이 장난이 아니라서 읽다가 정신줄을 놓았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작가의 작가-6.놀이 참고)와 달리, 생존 경쟁을 해야하는 아마존에선 동물을 사랑스러운 친구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법도 무용지물인 정글에선 사느냐 죽느냐 선택지는 둘 뿐인데, 결국 살아남는게 이기는 것이니까. 그저 연애 소설 읽으면서 한 세상 평화롭게 사는 게 꿈인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와 함께 정글을 누비면 그로부터 생존을 위한 ‘정글의 법칙’을 배울 수 있다.


 논리학에서 개념에 대한 정의는 종차에 최근류를 더하면 된다. 예를 들면 인간(개념)은 이성적인(종차) 동물(최근류)이다. 그러면 ‘동물은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이 아닌 존재, 비이성적인 비인간이다’ 거나 ‘인간이 아닌 동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면 동물에 대한 정의가 될까. 그러면 원숭이는 이성적일 수 있는 영장류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면 침팬지는, 그러면 고릴라는. 논리만 따지고 들면 인간도 동물이라는 큰 범주 안에 속한다는 점에서 개념간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말장난’ 같이 언어를 향유하는 능력, 무엇보다도 이것이 인간과 동물 사이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점이리라. 


 아마존 정글 안에 독서취향이 확실한 노인이 산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아도 쓸 줄은 몰랐다. 책은 ‘연인들이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 엔드로 끝나는 소설’만 좋아한다. 생존과는 전혀 관계없는 유희를 누리는, 피가 안 되고 살이 안 되도 진짜 놀 줄 아는 유일한 인간인 셈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터득한 노인은 문학 그 자체를 향유한다. 한 음절씩 소리내어 천천히 책을 읽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에도 여러 장면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특히 6장에 소설책 두 문장을 두고 ‘씹고 뜯고 맛보는’ 노인의 잉여적 행동은 정글에서 풍족하다 못해 부러울만큼사치스럽게 보인다. <폴은 모험에 따라 나선 친구이자 공모자인 사공이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동안 그녀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그 사이에 부드러운 방석이 깔린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수로를 따라 유유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뜨거운 키스, 뜨거운 입맞춤...’을 되뇌며 노인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는데 이 과정을 그려내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스타일이 매력적이다. 베네치아 곤돌라를 난가리트사 강(아마존 상류, 소설의 배경)의 곤돌라로 대입해보는 장면은 노인의 순수함이 묻어있다. 노인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잘 그려져 있는데다 덩달아 곤-돌-라-를 또박또박 따라 발음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몰입하는 인간의 모습은 예외없이 사랑스럽다.


 노인이 정글에서 책을 구하는 과정은 눈물겹다. 선착장에서 졸고 있는 신부의 손에서 책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거나 일년에 두 번 엘 이딜리오를 찾는 치과의사가 가져다 주는, 정확히 창녀 호세피나가 고른 도저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두 권의 연애소설을 아끼고 아껴가며 읽는다거나, 배 삯을 치르려고 사냥하는 장면이나 수크레 호를 타고 밀림을 떠나 엘 도라도 학교에서 5개월간 50권의 책을 읽고 결국 온통 사랑 얘기뿐인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밀림으로 들어온다거나. 노인은 읽을 줄 알아도 읽을 게 없어서 고생했다.


 노인이 책을 덮는 순간, 연애 소설을 읽지 않는 시간에 마주하는 정글에는 인간과 동물간 경계가 사라진다. 무기만 들었을 뿐, 인간들은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노인한테 주어진 암살쾡이을 죽여야 하는 숙명 같은 운명이 설득력을 잃는 지점이다. 물론 명분없는 이 싸움은 ‘이성적인 동물’이 먼저 걸었다. 사냥이 금지된 우기에 양키 사냥꾼하나가 암살쾡이의 새끼와 수컷을 무더기로 죽였다. 그렇다고 인간 사냥에 나선 위험한 동물을 내버려둘 수 만도 없다.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양키들이 들쑤셔 놓은 정글의 균형을 바로 잡는 데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메야했던 건 노인뿐이었다. 애초에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는 명예롭지 못한 싸움, 하지만 광채가 나는 마지막 대결 장면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절절한 슬픔이 흘렀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인 치코 멘데스를 기리는 헌정사를 이 소설의 서문으로 대체했다. 소재상으로 환경 소설을 표방하지만 작가가 조국 칠레의 반체제 반독재 운동에 활동하다 수감 후 망명길에 오른 점, 환경문제의 ‘최초 원인 제공자들’에게 정확히 독침을 겨눈다는 점, 라틴 아메리카 등 비문명, 저개발 지역을 배제하는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혐오하는 점을 감안하면 고도의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선과 악의 분명한 경계, 짧고 쉽게 읽히는 소설, ‘인간 승리’를 표방하는 헤밍웨이의 노인 산티아고와 달리, 원주민 수아르족으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로부터 자연을 외면한 인간의 탐욕과 위선을 경고하는 점에서 모더니즘을 정면으로 뒤집는 작가 정신이 돋보인다. 

 완성되면 고칠 수 없는 ‘하나의 자연’같은 책들을 만지작거리는 게 다인 나로선 환경에 대해선 여전히 무지하다. 싱가포르보다 더 무더운 고국의 폭염이 반가울 리도 없고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는 웃픈 세태에 행동 대신 무용한 탄식만 늘어 놓는다. 나를 봐도 더이상 도망가지 않는 우리집 도마뱀을 보면 가끔 무시당하는 기분도 들지만 ‘도시 정글’에서도 말없이 교감 가능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게코야 사이좋게 지내자.”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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