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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산 인간'의 선택
값싼 동정은 반사

[작가의 작가]05.운명 : 미투와 북한 이슈를 단번에 꿰는 소설

 2018년 상반기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슈들을 쫓느라 숨이 턱까지 찼다. 미투부터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까지. 농담 처럼 중립국 싱가포르에서 역사적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고 덕분에 북한 서적을 구하러 한국에 다녀올 좋은 핑계거리를 찾았다. 운 좋게 대훈서적이 발행한 홍석중의 <황진이(2002)> 단행본과 북한 원전을 구할 수 있었다.  금강일보 재직시절, 2011년 대훈서적이 보유했던 장서들이 건물 밖으로 쫓겨나듯 방치됐을 때 나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없었다. 다행히 선배 기자의 기지로 고물상에 버려진 책 일부를 신문사로 옮겨 보관할 수 있었지만 기증을 하겠다고 해도 선뜻 받아주는 기관이 없어 죄없는 서적 더미 위로 먼지만 쌓여갔다. 기증은 성사됐지만 수소문해보니 책 행방은 묘연했다.  


 특수자료 도서관을 뒤지고 한밭도서관 자료실을 헤매일 때 대훈서적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지역서점의 마지막 흔적을 쫓는 일이 무슨 의미기 있나 싶다가도 시대를 앞서간 창업주의 선구안이 새삼 놀라웠다. 긴 설명없이 입국한 재외국민이 신기했던지 사서가 국정원 요원이 쫓아온다는 협박같은 농담을 던졌을 때 알 수 없는 긴장감도 사라졌다. 


 어렵사리 <황진이> 읽을 수 있어서 전율이 일었다. 해방 후 당국의 허가를 얻어 발행된 최초의 북한 작품이자 만해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점, 작가 홍석중이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끊어진 남북 문예교류를잇는 사료로서 그 가치는 충분했다. 


 하지만 단순히 분단 이후 문화 간격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물 황진이를 다루기엔 그녀의 인생과 업적이 너무 아깝다. 사실 이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문장 하나하나가 판소리 장단 같이 들려서, 이야기가 제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읽었다. 중간중간 작가의 작중 해설이 등장할 땐 ‘전설의 고향(TV시리즈)’을 보는 듯했다.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라면 다 아는 송도(현 개성시의 옛 이름) 3절,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고 시작하는 시조 한 자락 등익숙하지만 재구성된 사건과 인물 묘사는 탁월했다. 


  소설 황진이는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태준의 작품을 원류로 삼는데 해방 후 남한 기준으로 정한숙, 최인호, 김남환, 김탁환 등의 황진이가 그 계보를 잇는다. 이 가운데 시점을 달리한 고백투의 김탁환의 <나, 황진이(2002)>는 세련된 작풍을 보여주지만, 고전다운 맛은 홍석중의 것이 강하다. 홍석중의 <황진이>에 수록된 인민예술가 차형삼의 표지, 삽화도 전통 멋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16세기 중종조 시절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홍석중의 <황진이>의 특이점은 놈이라는 허구적 인물을 창조한 데 있다. 상전 진이를 사랑했지만 출생의 비밀을 폭로해 파혼하게 만들고, 화적패 두목으로 류수사또 김희열의 희생양이 되는 불우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가질 수 없으면 파괴해버리는 나쁜남자의 전형이지만 진이가 청교방의 기생이 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고도 계급을 이유로 이루어질수 없는 비극적 사랑이 애잔하게 그려지는 건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벽계수 충남(리종숙)과의 인연, 위선적인 귀벽사 원목대사를 골려준 일화며 김희열과 위태로운 관계는 가히 원초적이다. 


 놈이가 죽고 진이의 노년은 어느 잔치집에서 소리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 옆에는 리사종이 있었다. 리사종은 선전관 벼슬도 내던지고 진이와 산수유람을 다니며 거문고 짐꾼을 자처한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한 여인을 향한 삼매(마음을 한곳에 집중시켜 흔들림 이 없는 평등심, 출처:불교용어 사전)에 빠진 모습이 진정한 풍류남아의 전형이다. 오직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삼매의 경지에 이르러야 지혜를 얻고 대상을 바로 보게 된다는 부처의 가르침이 남달라보이는 장면이다.  


 삼매의 경지는 홍명희의 <임꺽정> 피담편도 등장한다. 화담 서경덕이 선비 심의와 함께 진이와 동침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전식 ‘쓰리섬’인데 심의는 진이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도발에 실망한다. 화담은 진이의 짖꿎은 장난에 “진이가 저의 맘대로 장난을 치는 것은 눈에 세상이 비어보이는 까닭이야. 불가의 말로 ‘유희삼매’(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 출처:시공불교 사전)라고나 할지.”라며 두둔해준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와 기생의 우정도 우정이지만, 어떤 관습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의 경지’를 누리며 운명을 그려나가는 여성을 만났다. 


 지난 2002년 육로개통 전에 금강산 모꼬지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속초와 장전항 사이에서 월드컵 8강 승부차기를관람했고 스무살 생일을 학보사 동기들과 함께 보냈다. 모꼬지 내내 가는 비 맞으며 구름 아래 가려진 절경을 놓쳐 심란했다. 마지막날 걷힌 구름사이로 온전한 산세를 확인하는 것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며칠 뒤 터진 서해교전으로다음 일행은 일주일 넘게 억류돼 있다 입국했다는 소식에 가슴을 슬어내렸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비구름 발아래금강산을 두고 한자락 노래 부를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낡은 이념 투쟁은 그만 두고 특수자료취급인가 없이도 책이나 실컷 사보고 읽을 날을 꿈꿔본다. 이게 무슨 데자뷔인지.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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