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현애 Nov 01. 2020

한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힘

[작가의 작가]04. 정신 :  강물이 웃는 소리를 들었나요

 불교 국가 미얀마에서는 이슬람교인 소수민족 로힝야족이 박해를 받고, 스리랑카 스님 친구는 싱가포르의 한 작은 사원에서 중국인 신자들과 공간을 나눠쓰며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 방글라데시 이민자는 건설 노동자로서의 삶을 담은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그는 지난 2013년 발발한 리틀 인디아 폭동의 실상을 자국에 알리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소수의 소수, 즉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를 싱가포르에서 관망하면서, 종교에 의한 집단간 힘의 균형이 상대적일 수 있음을 ‘생활’로 체험 중이다. 


 무신론자를 자처하지만 타국의 종교 갈등을 뉴스로 접할 때 마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인류를 먼저 탓하다가도, 잔인할 수 있을 신의 교리를 곱씹기도 한다. 예수와 부처, 알라의 존재를 경전으로 확인할 수 밖에 없어서 성인들의 이야기는 마치 완성된 한 인간의 전기로 읽힌다. 실체적 성인은 그 누구도 만날 수도 알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싯다르타가 세존 부처 고타마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도를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고 악을 피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이토록 명백하고 존귀한 가르침이 빠뜨리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략) 어떤 다른 가르침, 더 나은 가르침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고타마의 가르침의 목적이 번뇌로부터 해탈이라면 싯다르타는 어떤 가르침도 세상의 단일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세존 부처에 맞선다. 여기서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어떤 가르침 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내면적 성찰을 읽을 수 있다. 더욱이 싯다르타가 “하지만 그 분은 나에게 싯다르타를, 나 자신을 선사해 주셨다”고 말하면서 1부의 정신적 탐구를 마치고 2부 세속적 세계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제공한다. 


싯다르타가 부처의 이름인 탓에 헤세의 싯다르타가 마치 부처의 이야기로 오인될 수 있는데 분명한 것은 소설 속 싯다르타는 부처인 고타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속 세존 부처 고타다마는 완성자, 성인이라면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위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에겐 우정을 나누는 네 명의 친구가 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와 유년을 함께 보내고 고타마의 제자가 돼 출가했다가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의 순간을 함께 한다. 두 번째 친구는 뱃사공 바주데바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를 두 번 만나는데 유명한 기생인 카밀라를 만나고 헤어질 때, 다른 인연의 시작과 끝에서 마주친다. 세속으로 들고 나올 때, 세속으로부터 환멸을 느끼고 생과 연을 끊고자 강에 몸을 던지고 다시 살아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싯다르타는 바주데바 곁에서 그의 조수로 생의 기점을 다시 잇는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세속적 세계를 함께 보내는 카밀라와 재력가 카마스와미인데 싯다르타는 이 시기에 그들과 세상의 모든 부와 환락, 권력을 누렸다.

 네 친구 중에 최고의 우정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뱃사공 바주데바와의 연(緣)이다. 생에 대한 비유로써 강의 흐름에 대한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의 말을 경청하는 법과 경건해지는 법을 강으로부터 배운 체험으로서의 앎을 추구한 바주데바와의 우정이 이 책의 정수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 앞에서 자기고백과 참회를 멈추지 않았다.


“싯타르타는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사람이 이제 더이상 바주데바가 아니요, 이제 더이상 인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중략) 바주데바의 변해버린 본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그것을 더 많이 느끼면 느낄 수록, 그런 인식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파고들어갈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이상스럽지 않은 것이 되어갔으며 (중략) 바주데바는 벌써 오래 전부터 벌써 언제나 그런 존재였는데, 다만 자신만이 그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였을 따름이라는 것을, 사실상 자신도 그런 바주데바와 거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점점 더 많이 통찰하게 되었다.”


 바주데바와의 우정은 싯다르타가 삶과 인식 사이의 균열을 인지하게 하는 데 이는 앞서 세존부처 고타마와의 대화에서 그의 가르침을 세계의 단일성에 생겨난 ‘조그마한 틈새’라며 자신만의 화두를 던지는 대목과도 일맥상통한다. <김성옥 2016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에 대한 불교적 해석. 외국문학연구,(64), 53-71 참고>


 이미 싯다르타는 부처의 가르침은 세계의 단일성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체험을 통해 얻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르침이 말로 전달되는 순간 우리는 그 균열, 틈새를 발견할 뿐이다. 모든 인간이 부처일 수 있다는 일체성의 깨달음, 싯다르타의 네 우정이 결국 부처와의 우정일 수 있다는 깨달음, 결국 모든 사물과 현상,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짧지만(126페이지:이북기준) 깊은 정신 세계로의 탐독을 원하는 독자에게 강추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이전 14화 '산 인간'의 선택 값싼 동정은 반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