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작가]03. 고통 : 괴물의 논리에 대처하는 처연한 인간
통증은 차라리 고맙다.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제 때 보내주니 탈 난 곳을 찾아서 치료하면 된다. 중증 질병이면 조기에 발견된 탓에 환자로서는 더 잘 된 일이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작가의 작가-2.몸 편 참고)은 <동의보감, 몸과 우주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잘 산다는 건 아플 때 제대로 아프고 죽어야 할 때 제대로 죽는 것, 그 과정들의 무수한 변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섭리에 따르는 삶이 양생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고통을 즐길까. 운동선수, 보디빌더, 연예인들을 보면서 너도나도 ‘식스팩’과 ‘몸짱’, ‘다이어트’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혹사시키는 것 같아 그들을 볼 때 마다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덤벨과 바벨을 들고 내리고, 무게와 횟수를 매번 증가시켜가면서 더군다나 살인적인 식단을 견뎌가면서, 자신의 한계와 싸운다는 설정이 전위적으로 비췄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SM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이유는 정신 세계를 담고 있는 몸을 삶의 도구로 삼는다는 데 있다. 이런 소중한 몸에 예방차원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 준다는 점에서 고통보다 통증은 정말 고맙다.
사드의 <미덕의 불운>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성욕인 사디즘의 원류가 되는 책이다. ‘불행한 사람이나 남의 고통을 즐긴다’는 쥐스띤느의 울부르짖음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아직도 몸서리쳐지지만 선을 좇아 가시밭길을 걷는 그녀의 행보에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하면서도 상상 가능한 온갖 변태와 악인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탓에 이야기 전개상 지루할 틈이 없다. 타락한 사제들, 고리대금 업자, 방화를 저지르고 탈옥하는 여죄수와 협잡꾼들, 모친을 독살하는 동성애자 후작, 인체를 한낱 해부 표본으로 삼는 의사, 배은망덕한 위조주화업자, 귀부인으로 변신해 다시 범죄를 종용했던 여죄수, 쥐스띤느를 방화, 유아 살해 및 절도범으로 고발하는 장사꾼까지. 고통 속에 허우적 대는 그녀의 독백에 지쳐갈 때 즈음, ‘제발 그녀가 평안을 얻은 수 있게 그냥 죽여 주세요’라고 사드를 향해 내가 막 울부짖는 순간, 쥐스띤느는 유일한 혈육인 언니 쥘리에뜨를 만나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그 뒤 충격적인 결론은 독자가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변태 성욕자인 사디스트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문제는 이들이 내 뱉는 말에 점점 설득된다는 점이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결초보은 등 하나 같이 도덕 군자 같은 자신의 신념만 고집하면서 가시밭길을 걷는 쥐스띤느에게 각각의 인물들은 그만 세상과 타협하라고 타이른다. 동성애자 후작은 실존주의를 이해하고 있고, 의사는 공리주의를, 위조주화업자는 불평등의 기원을, 귀부인으로 나타난 감방동료는 근대 법철학을 설파한다. 악도 논리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미덕의 불운>이 실존주의와 궤를 같이 하는 탓에 사디즘의 이해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존재(탈존)는 본질에 선행한다’를 곱씹어보는 것으로 출발해야한다. 사르트르는 애초에 선, 악과 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규정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은 애초에 없다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Philosophy:the Classics 3rd edition by Nigel Warburton,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참고). 여기서 자유의 개념이 출발하고 인간은 과거나 현재와 다른 자신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의 삶을 느끼고 그 의식의 흐름을 기술함으로써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 쥐스띤느의 불운은 결국 그녀의 결정에 대한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인 그녀가 온전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녀의 고통이 불운으로 명명되는 이유다. 지나치게 원자적이고, 비관적이고, 가혹할 수 있다. 악한들이 쥐스띤느를 괴롭힐 수 있는 이유도 전적으로 악한들의 결정에 달려 있으므로 악한들의 악행은 다른 악한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자유와 책임의 근거를 서로에게 찾는다. 여기서 그만 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 신의 등장; 문학 작품에서 갈등 해결을 위해 뜬금없는 사건을 이끄는 플롯 장치 출처:위키백과)’를 외치고 싶다. 고통은 제발 안녕. 신은 도대체 무얼 하시나 싶어서.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두 번 읽기를 권한다. 235페이지 밖에 안되는 분량 탓에 집중력이 좋은 독자라면 2시간 안에도 독파할 수 있다. 처음엔 포르노를 감상하듯이 몇 마디 탄식을 쏟아낼 지도 모른다. 그냥 스토리만 남기 때문에 짧은 분량이라도 잔상만 길게 남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첨에 열린책들 세계문학 이북 버전으로 읽었기 때문에 북마크, 형광펜, 메모 기능에 년 월 일 시 분 단위까지 기록돼 있어서 좀 놀라기도 했고, 읽은 지 벌써 4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흠칫했다. 그 땐 ‘가시밭길’ 쥐스띤느만 보였다면, 두 번째는 쥐스띤느를 괴롭히는 ‘타자’들에 더 눈길이 갔다. ‘괴물’들이 쥐스띤느를 괴롭히는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의 이유를 대화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를 위한 진정한 충언이었는지,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이었는지, 행위에 대한 책임회피를 위한 궤변이었는지 혹은 실존주의 비판에 대한 근거 혹은 반박 근거를 그 ‘타자’들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는 3회독 때 할 생각이다. 고전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의 정신 대신 언제든 만질 수 있는 몸.
그런데 이 책은 청소년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다.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한다 치더라도 철학 용어와 정의 자체를 오해할 소지가 크다. 객관적 도덕의 부재, 신에 대한 조롱, 가학적인 묘사가 넘쳐나기 때문에 내가 만약 이 책을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접했다면, 제대로된 이해없이 회의주의자나 염세주의자가 됐거나, 우울과 불안, 절망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와 신에 대한 강한 불신과 함께. 희망을 생각하기도 바쁜 시절인데 절망을 접하고 내린 선택을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라고 등이라도 떠밀리게 되면 이건 분명 방치한 어른들의 책임이다. 이제껏 청소년들의 선택이 자신의 자유의지에라도 기댈 수 있는 토태가 있었나. 혹여 책임을 회피하는 어른들에겐 앙또냉 사제를 보내주거나, 브레삭의 채찍은 한 10대 정도, 달빌르의 감시 아래 알몸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게 시켜보거나, 뒤부와 부인과 24시간 수다떨게 하거나.
장 폴 사드의 <미덕의 불운>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