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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책, 밥, 우정

[작가의 작가]01. 죽음 : 보편성을 생각한다


모든 만남에는 많은 인연들이 중첩돼 있다. 중첩된 관계를 잇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고 그 친구의 친구가 또다른 인연이 되면서 단순했던 관계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장된다. 다양한 국적탓인지 나이와 성별을 차치하고서라도 싱가포르에서 맺은 인연엔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다. 터치 한 번에 쉽게 관계 맺는 세상이지만 면대면 관계를 ‘최애’하는 아날로그적 인간이라 우정을 위한 보편성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같은 책을 읽고 밥을 같이 먹는다. 

우정을 위한 책읽기의 첫 단추는 아이러니하게도 끝을 염두한 죽음으로 채우고자 한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유한성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다보니 필립로스의 <에브리맨>은 참을 수 있는 죽음의 무거움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을 두고 호들갑 떨지 않는데 있다. 죽음에 애써 의미 부여하기 위해 가식을 떨지 않는 필립로스만의 스타일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끔찍한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것도 문제지만 수식 없이 문학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곳곳에 상징적인 소재를 쓰면서 복선을 넌지시 던져주고 일상적인 언어로 노년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노련함이 작가의 내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전체 플롯 역시 주인공의 장례식에서 과거 회상 구조로 단순하게 구성돼 있어서 ‘흔해빠진 죽음, 그거 아무것도 아니잖아’라며 죽음에 냉담한 작가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의 삶을 압축하면 시계, 다이아몬드, 여자, 그리고 가족과 예술로 점철된다. ‘에브리맨’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상 이름인데 해밀턴 시계를 코트 안주머니에 품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부터 다이아몬드가 블루칼라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보석상을 거쳐간 여직원들을 보면서 자란 주인공의 유년시절을 통해 욕망으로 가득찼던 주인공의 삶과 그 끝을 예측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신과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홀로코스트-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라고 굳게 믿음-를 겪은 폴란드계 유대인인 점을 감안하면 신과 인간에 대한 회의가 동시에 들었음이 틀림없다. 천국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불완전한 주인공의 삶 속에서 필립로스가 담담하게 풀어내는 인간 그 자체로의 인간을 엿볼 수 있다. 성공한 광고기획자, 세 번의 결혼, 방치하다시피 키운 두 아들, 건강한 형에 대한 질투, 요양원에서의 노년생활, 그의 마지막 안식처인 딸 낸시와의 관계 등 지구 반대편 미국 노작가가 버무려내는 인간의 오욕칠정이 싱가포르에 발붙이고 사는 코리안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책에서 죽음은 처연하거나 슬프지 않다. 값싼 연민이나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지속되는 전투같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책 초반부에 낸시가 아버지에게 하는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가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보여준다고 해도 무방하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것이다. 반면에 죽음을 앞둔 노년은 전쟁보다 더 처절한 대학살이라고 규정한다.

화이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WASP)로 대표되는 미국의 주류문화에서 작가도 ‘멜팅팟’에서 ‘샐러드볼’ 이론의 대상이 된 이민자 중 한 사람이었음을 감안하면 작가적 특수성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으로 이끌어낸 작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작가는 시골 촌부도 거지도, 살인자도 읽는 책을 쓰겠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작가의 욕망과 동시에 위선적일 수 있는 보편성을 생각했다. 보편성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기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땐 서양 중심의 보편성을 비판적 시선으로 노려보면서 노벨상과 국제표준화기구(ISO), 리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유없는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모국을 떠나 글로 배웠던 다양성을 싱가포르에서 외국인의 신분으로 체험하다보니 보편성에 대한 오해를 조금은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지금은 보편성을 문학을 즐기기 위한 잣대 중 하나로 보려고 노력한다.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 읽기 위해서.



필립로스 <에브리맨>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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