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학생에 관해 동료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였다. 반복되는 아이의 문제 행동으로 같은 학급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지도하는 교사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아이 문제를 의논하던 동료와 더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정상 가정’이라...
동료가 말한 ‘정상 가정’이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 학생은 어머님이 계시지 않았다. 나는 동료의 말에 일정 부분은 동의할 수 있었다. 아이의 문제 행동이 가정에서 출발했다는 점 말이다.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출발이 ‘가정’인 경우는 많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많은 선생님들이 동의하신다. 가정의 문제로 아이는 문제 행동을 반복하고 또 그 가정 문제로 문제 행동이 개선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럴 때면 한탄스럽게 아이의 가정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그 '정상 가정이 아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이날 우리의 화두가 되었던 학생 A는 아버지와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 역시 일 때문에 바빠서 주 양육자가 할머니인 아이였다. A를 3년 정도 지도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이 되는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였다. 약점이 많은 친구를 장난을 빙자하여 극심하게 놀리거나, 선생님조차 자신이 만만하다 싶으면 버릇없이 굴며 수업의 맥을 끊어놓았다. 3년 동안 A로 인해 그만두게 된 선생님도 있을 정도였으니 아이의 버릇없음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A가 유독 잘 따르는 선생님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나였다. (처음 A를 만났을 때 아이의 취미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말을 걸어준 것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A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준 것이 주요했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A는 ‘애정 결핍’이었고, 비뚤어진 방식으로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했는데, 고등학생이 되면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A는 여전히 비뚤어진 태도를 고수했다. 문제는 중학생 아이들 사이에서 그 아이의 장난은 그저 웃기는 일이었지만,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 사이에서는 학업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학원은 학습을 위해 와 있는 곳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학업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A와 거리를 두었다. 문제는 그럴수록 A는 더 비뚤어진 방식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A는 악순환의 고리에 접어들었고, 그런 A로 인해서 학원 전체가 비상 회의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익을 추구하는 학원의 입장에선 A를 제명하는 조치가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지내온 정이 있어서 당시 제명하지는 못했다.)
반복되는 아이의 문제에 나는 아이의 할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A의 문제는 사실 주양육자인 할머니에게서 출발했다. A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제 행동이 반복적으로 있었고, 그때마다 A의 할머니는 학교를 쫓아가서 A의 역성을 들고는 하셨다. 엄마 손에서 자라지 못하는 어린 손자가 할머니의 눈에는 애가 닳으셨겠지만 그것이 아이를 망치고 있었다. A가 처음 우리 학원에 왔을 때, 문제 행동으로 호되게 혼이 났던 적이 있었다. A의 할머니는 그 일로 학원을 바로 그만두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A를 혼내기 전에 이미 애정도 충분히 주었기 때문인지 A가 도리어 할머니를 설득해서 학원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우리의 훈육에 대해서 A가 할머니에게 ‘고자질’을 하는 일은 사라졌었다.(당장에 본인이 혼난 것이 싫으면서도 우리와 헤어지는 것도 싫은 아이라는 점에서 아이는 애정결핍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후로도 할머님은 너무 자주 A를 감싸고도셨다.
A집안의 양육환경의 또 다른 문제는 과도한 물질적 보상이었다. A할머님이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돈을 쓰신 이야기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할머니의 그런 태도가 A에게 너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할머님은 A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셨다. A는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돈을 잘 쓰고, 최신형 IT기기를 쉽게 교체하고, 비싼 취미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돈을 쓰겠다는 게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걸 아이가 영악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A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제 돈(정확히는 할머니의 돈)으로 같은 학급 아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방법은 아주 쉬웠다. 쉬는 시간에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를 제외하고 나머지만 끌고 편의점에 가서 한턱을 쏘는 거다. 그걸 꾸준히 반복하면 자연스럽게 누군가는 소외된다. 원래 그런 사이들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교우관계뿐만이 아니었다. A에게 놀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두고는 왜 성적이 안 나오냐고 탓하는 행동을 반복하셨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A의 핸드폰이다. 3년 동안 내가 본 A의 핸드폰 기종만 3개였다. (갤럭시 새 시리즈가 나오는 것을 예약 구매하더니 아이폰 새 시리즈가 나오니 핸드폰을 또 바꿨다.) 새 기종이 생긴 아이가 얼마나 신나게 놀지 상상이 되는가?아이는 때로는 자제하지 못하고 수업시간마저 핸드폰을 가지고 놀았다. 그런 아이를 훈육하는 교사들에겐 자기 아이를 혼냈다는 이유로 쫓아와 따지는 행동을 반복하니 아이의 문제 행동이 개선이 될 수가 없었다. 때로는 A의 문제 행동을 지적하는 교사에게 A가 도리어 되바라지게 구는 경우도 많았다. A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니 A와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A는 문제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적이 없었다. 매번 왜 나에게만 그러냐는 식이거나, 쟤도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식이었다. 혹은 자신이 혼나는 상황이 같은 반에 있는 다른 학생이 고자질을 해서라고 생각해서 그 학생에게 보복을 했다. 키는 훌쩍 커버릴 대로 커버린 A지만, 할머니 치마폭을 믿고 까부는 A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꼬마일 뿐이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니, 동료 교사가 말한 ‘정상 가정’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료 교사의 발언에 대한 내 답은...
아이가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A의 같은 반 친구 중엔 B가 있었다. B의 아버지 역시 일 때문에 아이들을 살필 수가 없어 할머니가 주양육자이고 어머니는 함께 살지 않는다. 중학교 때 B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친구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 장난기도 있었다. 그러나 B의 문제 행동? 오히려 B는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심지어 그 발언을 한 동료 교사도 B는 좋아했다. B는 살짝 귀여운 허세를 가끔 부리고는 했는데, 매 순간 정답을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었다. 그 답이 맞으면 으스대고, 틀리면 또 뻔뻔하게 웃어넘기는 아이였다. 수업에 적극적인 참여만 해도 선생님들은 아이를 예뻐하지 않을 수 없다. 교우관계 또한 좋았다. A가 그룹에서 소외시키려고 했던 아이와도 B는 잘 어울렸다. 딱히 B가 싫어하는 아이도 없었고, B를 싫어하는 아이도 없었다. 학원에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데다 소극적인 성격의 아이가 있었는데 B는 그 아이와도 가끔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A와 B는 단순하게 그 '정상 가정'이라는 조건만 놓고 보면 똑같다. 그럼에도 두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다르겠는가? B의 동생도 싹싹하고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동성, 이성에 관계없이 같은 학급 아이들과 다 잘 어울리는 밝은 아이였다. 학원에 원비를 내러 오신 아버님을 뵙지 못했다면 B의 가정환경에 대해 아마 아주 오랫동안 몰랐을 것이다.
내가 5년을 가르치면서 가정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C도 그랬다. 나는 C와 중학생 때 만나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동안 C는 모든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였다. 어찌나 싹싹하고 다정한지 선생님들이 농담으로 C 같은 아이가 1등 신랑감이라고 농담을 했다. C의 같은 반 여학생들 중 몇몇은 다른 남학생들과는 절대로 말도 안 하면서 C에게는 장난도 잘 치고 같이 어울려 독서실도 다녔다. (C에게 미안하지만 절대 미남은 아니다.) C의 친구들은 모범생도 있었고, 소위 말하는 양아치까지 있었다. 정말이지 C의 성격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학업성취도 나쁘지 않았고, 선생님들에게 버릇없이 구는 친구들을 오히려 C가 나무랄 정도여서 누구 하나 C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C는 엄청 구박을 하면서도 동생의 학업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듬직한 맏이였다. 저런 아들을 키우는 부모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거라는 소리를 선생님들은 종종 했다. 나는 그런 C가 고3이 되어서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와 이모의 손에 컸다는 사실을 알았다. C를 키워주신 분들이 정말 건강한 사랑으로 키워주셨던 거였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가정의 모습은 티가 난다. 그것은 정상이냐 아니냐 따위가 아니다. '건강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가가 아이에게서 보이는 것이다.
친한 선생님께 들은 초등학교 2학년 교실의 이야기다. D와 E가 사소한 다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D가 E에게 “너는 엄마 없어서 그래!”라고 말을 했다. 겨우 9살인 아이들이 친구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알아야 뭘 얼마나 알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D에게 E는 엄마가 없는 아이라서 그런 아이라고... 도대체 ‘그런 아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했으니 나온 말 일 것이다. 그 상황을 알게 된 당시 선생님은 E가 받았을 상처를 너무 걱정했다. 참관 학습 때 E를 위해 학교에 왔던 할머님이 생각나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 E는 의젓하게 말했다고 한다. “D가 화가 나서 나쁜 말을 한 거래요. 괜찮아요.” E에게 그런 말을 해 준 다정한 어른은 누구였을까. 정말 '건강한 사랑'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양육자는 누구일까?
주양육자가 부모가 아닌 경우도 많고, 부모님이 함께 살지 못하는 가정도 많다. 그 가정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말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A의 문제는 순전히 주양육자의 비뚤어진 사랑방식 때문이지, 부모가 함께하는 가정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정상 가족' 발언을 듣고 나니 A와 유독 씨름을 크게 하는 동료 교사가 더는 안쓰럽지 않아 졌다. 오히려 당신이 사랑으로 아이를 감싸지 않으니, 아이가 더 당신의 수업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따지고 싶었다. (물론 학원은 학교가 아니다. 인성교육이 아니라 학업성취가 더 중요한 공간이다. 그래서 차마 동료 교사에게 따지지는 못했다.) 주양육자가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아이는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더욱이 A는 3년을 우리와 함께 매일 3~6시간을 보내왔다. 초반에 버릇없던 나쁜 습관 중에서 여러 부분은 고쳤다. 최소한 나에겐 되바라지게 하지 않았다. 긴 주말 보강을 끝내고 A가 내 커피를 사 들고 왔던 적이 있다. 자기 때문에 내가 너무 고생을 했다고 말이다. A는 건강한 사랑을 받은 경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그 비뚤어진 방식으로 세상을 대한다. 마음이 아프지만 A의 문제는 쉽게 고쳐지지 않을 일이다. 더욱이 그 동료처럼 A를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A는 비뚤어진 아이로 살 것이다.
‘정상 가정’은 없다. ‘건강한 사랑’이 있을 뿐.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랑’을 주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시 ‘건강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