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큰아들은 잘 지내?”
나와 그 아이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종종 녀석의 안부를 묻는다. 녀석과의 시간이 꽤나 길었고, 못난 선생은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탓에 녀석을 아는 사람들이 많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나의 대답은 대부분 이렇게 끝난다. 녀석은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맞다. 대부분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이 오므로 오지 않는 연락은 내게 걱정거리는 아니다. 그것이 녀석이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아이와의 인연은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그저 수업을 듣는 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 학교에서는 살짝 불량하다고 평가받을 꾸러기 녀석. 내가 공교육에 있는 사람은 아니니, 이런 학생이 나에게 있는 것이 좀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다. 녀석은 내가 근무하던 학원에 원비가 체납되어 그만두게 된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중학생 꼬마가 술을 마시고 학원에 왔다고 하면 녀석에 대한 이미지가 좀 걱정이지만, 녀석은 그런 사고를 친 놈이었다. 신참교사였지만 비교적 아이들이 잘 따르는 편이라서, 녀석의 관리를 내가 하게 되었다. 학원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우선 아이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상담실에 분리를 시켜놓고 아이와 마주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자초지종은 들어야 했다. 집안문제로 인해 아이는 방황하는 중이었고, 그 누적된 화를 나쁜 방법으로 친구들과 해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나쁜 소리를 가르친 어른들이 잘못이다. 아무튼 녀석은 술을 마시면 집안 문제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당연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고, 아버지의 호출을 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부름이 있으니 가기는 해야 하는데 이미 마신 술이 또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학원 수업이 늦게까지 있다는 핑계였다. 술을 마신 녀석이 학원에 온 것은 그 변명을 부탁하고자였다. 이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는 아이의 말에 화낼 기운이 빠져버렸다.
“야, 그냥 싫다고 내질러.”
친구가 아니라 선생이란 작자가 한 소리다. 아이한테 네가 참아라 이해해라 뭐 이런 소리는 한마디도 안 했던 거 같다. 도리어 반항을 하라고 부축인 나쁜 선생이 나였다. 그런데 이 착한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눈물을 보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게 두었다. 평소의 녀석이 껄렁거리고 불량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근성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아이는 한 번도 어른에게 예의 없게 군 적이 없었다. 늘 밝게 웃고, 친구들도 많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 밝은 모습 뒤에 감춰진 그늘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런 위로뿐이었다. 얼마 후 아이는 수업료 체납 문제로 그만두게 되었다.
“선생님 저 조금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정확한 문자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손을 먼저 내민 것은 아이였다. 참으로 못나게도 어른이 먼저 내밀어 준 것이 아니라 말이다. 내가 그 학원을 그만두게 된 다음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아이로부터 연락이 왔고, 약간의 프린트와 요점 정리를 해주며 녀석과의 연이 이어졌다. 중학교 3학년으로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아이가 고민할 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인문계를 권했지만 아이는 가정형편을 이유로 특성화고를 택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입시강사인 나는 아이에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어쩌다 한 번씩 수업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되기가 어려웠다. 아이 역시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로 집중해서 학업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다시 아이와의 연이 끊어질 뻔했었다.
“제가 받아 드리는 서비스예요.”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식당이었는데, 그건 정말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가 없었다. 녀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가게에 정말 우연하게도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멍청한 선생은 아르바이트생으로 녀석이 있는 것도 엄청 뒤늦게야 알았다. 당시에 녀석은 학업보다는 아르바이트에 더 집중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 또한 아이의 삶이기에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아이를 또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또 언제라도 나에게 손을 내밀기를 바라며 그 후로 또 두어 번 녀석이 일하는 가게에 갔었다. 그리고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다시 나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 저 대학 가고 싶어요.”
아이와의 그 일 년은 내게 너무도 고마운 시간이자 미안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너무도 부족한 선생이었지만,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 못난 선생을 만나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수업을 했던 시간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거 같다. 입시를 생각하면 아이가 공부에만 집중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욕심이 되는 상황들이 속이 상했었다. 그저 일주일에 하루라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살펴주는 것이 못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부족한 나는 주위에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 아이의 4년제 진학이 물거품이 되었던 그날은 기억하기조차 싫다. 물론, 그것은 이루기 힘든 꿈이었던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제대로 도전도 못 해 보고 좌초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야, 어른인 네가 중심을 잡았어야지!”
그날 아이 앞에서 울음이 터져버린 선생을 질타한 친구로 인해 나는 정신을 다시 바짝 차렸다. 내 실수로 너무 놀라 아이 앞에서 내가 눈물을 보였고, 오히려 아이는 덤덤하게 나를 챙겼었다. 세상 못나도 이렇게 못난 사람이 없다. 너의 선생도 어려서 그랬다는 변명을 하기엔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여전히 마음이 쓰인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에 녀석에게 다시 그날의 일을 사과하고 싶다. 나도 많이 부족한 어른이라서 너의 앞에서 어른답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이다. 우여곡절은 좀 있었지만 아이는 결국 전문대학에 진학을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가끔 이런저런 질문을 하거나, 리포트 작성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건 그저 귀여운 일들이었다.
“선생님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아이가 했던 말 중에서 나를 가장 가슴 벅차게 했던 말이었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쩐지 나를 닮아가는 것 같다는 아이의 말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귀한 칭찬이었다. 녀석이 중학생이던 그 시절에, 나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아들’이라는 호칭을 썼었다. 내가 너무 어린 선생이라서 어린 티를 내지 않고자 한 것도 있고, 학교에서 다소 소외받는 그룹의 아이들이라 쉽게 정을 붙이게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종종 학생들에게 ‘아드님’, ‘따님’ 같은 말을 하고는 한다. 친근감을 표하는 농담이기도 한데, 그때만큼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긴 하다. 그런데 녀석이 그 말을 하던 순간. 아 정말 이 녀석은 내 아들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사제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은 그때 느꼈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고, 선생의 말과 행동, 생각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그것을 아이들이 닮아간다면... 그 역시 아이의 부모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해서 나는 더 좋은 선생이 되고자 애쓰게 되었다. 나의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내가 녀석을 보살폈다고 생각한 그 긴 시간 동안, 녀석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배웠다. 해서 나는 늘 아이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떠벌리고 다닌다며 녀석이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지만, 녀석과의 시간을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선생으로 살아온 십 년이란 시간의 가장 앞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있으면 그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다.)
아들아,
이제 내가 너에게 뭘 해줄 수는 없겠지만, 살다가 지치는 순간이 올 때 이 못난 선생을 생각해다오. 어린 시절 네가 내민 손을 잡았던 것처럼, 나는 다시금 너의 손을 꼭 잡고, 너의 슬픔을 들어주고, 네가 다시 씩씩하게 나가는 것을 지켜봐 줄게. 살다가 기쁨이 넘칠 때도 이 선생을 생각해다오. 누구보다 더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고 응원해 줄 테니까.
사랑하는 나의 큰아들, 늘 고맙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