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북선생 Jul 15. 2021

숨 쉴 구멍

아이들을 지도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특유의 ‘감’이라는 것이 생긴다. 아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레이더에 걸리는 순간.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있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된다면 아마 나는 선생 짓을 관두는 게 맞다. 일의 우선순위가 있어서 당장 아이를 잡아두지는 못하더라도 체크를 해두고 기회를 엿본다. 그리고 기회가 생겼을 때, 나는 아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날이었다. 처음 메모의 내용은 ‘아이가 나를 신뢰하지 않음’이었다. 새로 오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당시 A군은 그런 시기는 충분했음에도 어딘지 모를 이질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걸 이 선생은 아이가 나를 믿지 않는구나라고 판단했다. A는 분명 학업에 욕심도 있는 아이고, 성적도 중상위권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유 없이 아이는 수업시간에 산만하게 굴고 자꾸만 장난을 쳤다. 집중력이 약하거나, 수업이 어려워서 산만해질 수는 있겠지만, A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같은 반에 산만함과 장난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걔들도 내 수업엔 그런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데, A만 자꾸 여기저기 참견을 하며 딴짓이었다. 결정적으로 나에 대한 신뢰도 문제라고 받아들인 이유는 A가 수업 외 시간에 혼자 있을 때는 세상 조용하며, 혼자 묵묵히 자습을 하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과목 시간의 태도를 확인할 수가 없으니, 선생 입장에서 내 수업을 듣기 싫어하거나 선생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난 내가 신뢰하지 않는 교사의 수업에선 그렇게 삐딱할 수가 없었다. 가끔 엄마가 내게 "너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니?"라며 그대로 당하는 거라고 놀리셨기에 A의 문제를 나는 그렇게 인지했다. 어쩜 유명하다는 학원을 두루 거쳐서 왔던 A에 대한 나의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몰랐다.


보통의 아이들은 시험이 끝난 당일엔 등원하지 않는다. 우리도 굳이 그날까지는 수업을 진행하지 않으며 아이들이 쉬도록 두는데, A는 그날 그 반에서 유일하게 등원을 한 아이였다. 나는 아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기회라고 생각했고, 둘이 놀자며 천연덕스럽게 A의 앞에 앉아서 사소한 이야기들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대화 끝에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랬다.


“대학 가고는 싶은데,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너무 싫어요.”


A는 학습 의지가 있는 학생이었다. 원하는 학교가 구체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권 4년제 진학은 꼭 하고 싶어 했고 그것을 위해 본인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A의 학업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A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문계 고등학교였고, 주요 과목의 성적은 최고 2등급에서 최저 4등급 사이에 있었다. 사실 선생 입장에서는 A의 성적에 아쉬움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4등급의 과목들을 3등급으로만 올려주면 아이의 대학 진학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공부를 안 하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게 선생의 입장이었다. 욕심이 있는 아이가 그럼 왜 수업시간에 그렇게 산만했을까?


"전 제가 좀 잘난 줄 알았었어요."


A는 스스로 잘난 사람이라고 생했었다고 했다. 중학생일 때만 해도 말이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와보니 본인이 따라가기에는 벅찬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더 악영향을 끼친 것은 그간 그를 상위권 학생으로 만들어 주었던 과도한 학습이었다. 숨 막히게 공부하던 그는 자신이 그렇게 죽어라 노력했음에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자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더 무리하게 공부를 해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다소 무리하게 학습을 해왔고, 여기에 더 학습량이 늘어나니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A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성적을 보면서 스스로가 가장 괴로워하고 있었다.


“요즘 밤마다 제가 저랑 대화를 하거든요? 문제는 제 탓인 게 맞아요.”


이 말을 하며 나의 시선을 피하는 아이의 어두운 얼굴을 그의 부모가 보아주었다면... 내가 조금 더 신뢰받는 선생이라서 아이가 펑펑 울기라고 했다면 속이나 후련했을까 싶었다. 나는 아이의 탓이 아니라고 했다. 농담을 섞어서 이 나라 교육체계가 이상하다고 대신 욕이나 해줬지만, 사실 부모님이 조금만 태도를 바꿔주시면 될 문제라는 것도 알았다. 사실 A의 성적에 누구보다 민감한 것은 그의 부모님들이었다. 나도 A가 가정에서 학업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때까진 그 정도가 일반적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그 수준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떨어지는 성적에 부모와 갈등이 계속되었고, A는 집에서 공부를 다 때려치우겠다고 선언까지 해버린 것이다. A의 집에 한바탕의 폭풍이 몰아치고 나서, 우리 학원에 왔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말이다.

A의 저조한 성적을 그의 부모님들은 그의 생활 태도에서 찾았다. 성실하게 학습하지 않는 것, PC방에 가는 것, 게임을 하는 것 등 말이다. 그것들이 A의 성적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부모님들이 가장 중요하게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근본적인 원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하자면, A는 어려서부터 과도하게 학습을 했다. 심지어 그때의 A는 그 일을 부당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학습을 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했다.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부모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긴 시간 함께 달렸을 것이 분명했고, 그러니 지금 멈춰 있는 아들이 답답할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의 매니저가 되어 달리던 부모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숨 쉴 구멍’이다.


“평일에는 열심히 할 테니까, 주말 하루는 놀게 해달라고 타협하고 싶어요. 근데, 제가 이 말을 하면 엄마가 뭐라고 할지 뻔해요.”


학업 스트레스와 부모님과의 갈등을 풀 창구가 A에게는 없었다. 한동안 게임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잠시 A의 부모가 게임과 PC방을 이내 차단시켜 버렸다. (가지 말란다고 안 가는 아이라니 그의 부모는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이는 취미라는 것도 없었다. 이미 어린 시절 내내 공부 이외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들과의 소통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권해봤는데, 슬프게도 속마음을 나눌만한 친구도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내가 아이의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며, 아이가 차라리 내 앞에서라도 울기를 바란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다들 이해가 될 것이다.

A의 부모는 아이가 하교 후 집에 오는 시간, 5분 거리인 집에서 학원에 가는 시간까지 체크하고 있었고, 시험 기간이 아닌데도 주말에 책상에 앉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아이가 쉬는 시간은 언제일까? 하루 16시간, 일주일에 7일을 근무하는 직장인은 없다. 기계도 그렇게 가동하면 마모되고 망가진다. 설령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학업을 즐겼다고 하더라도, 부모는 아이의 여가시간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잠시 쉬었다가 출발하는 것이 더 높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이제 아이는 무기력증과 자책의 굴레에 빠져 있었다. 아이를 보며 ‘가면 우울증’이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 소란하고 활달하기 짝이 없는 아이, 친구들과 늘 소란스럽게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사실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하나가 없었다. 내가 느낀 이질감은... 선생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아이의 가면에서 느낀 것이었다.


“저 요즘 허세가 늘었어요. 공부 안 해서 그렇지 제가 공부만 하면 그냥 성적 잘 나올 거라고 막 잘났다고 말해요.”


속이 얼마나 곯았으면 그런 말을 할까. 공부를 하다가 스스로 마주한 그 벽이 아이에겐 공포였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영리한 아이이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서 주저앉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오죽했을까. 아이가 그 두려움을 말했다면 분명 도와주고 위로해주는 손이 있었을 텐데 왜 아이는 그걸 숨기려 했을까. 답은 부모에게 있었다. 부모가 정한 목표치가 너무 높았다. 아이는 그것을 알았다. 그 목표치에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까지도 아이는 알았다. 소위 말하는 SKY가 대단한 곳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한 아이의 삶보다는 말이다. 그 아이는 본인이 즐기던 대로만 공부를 한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점수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대학 진학은 어렵지도 않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A가 지금의 우울감에서 빠져나와서, 본인의 말대로 다시 정상적인 학습 태도로 돌아온다면, 더 크게 도약할지도 모른다. 결국 부모의 과욕이 아이의 삶을 갉아먹는 형국이었다. 아이는 부모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실망시키는 쪽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하는 반항으로 실망시키기를 택했다고 했다. 그건 너무 슬픈 이야기였다.


“제가 그렇다고 진짜 담배를 피우고 막 그럴 수는 없잖아요.”


토대가 건강한 아이였다. 본인이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일탈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그 말에는 이제 본인에게 남은 선택지가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들려서 불안했다. 아이가 일탈 행위를 할까 걱정이 되어서 등하굣길마저 관리하고 있는 그 부모에게 제발 댁의 아들을 조금만 믿어 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옳은 길과 그른 길에 대해서 아이도 알고 있으니 조금은 좀 놔주라고 말이다.

A는 조금 쉬어야 했다. 완전히 본인이 편안해질 때까지 말이다. 내가 아이에게 우리나라 교육체계를 운운하며 대신 화를 내준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스템이 결코 아니니까. 시험 한번 미끄러지면 내신에 타격이 있고, 아이도 부모도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선택지로 우리 학원을 택했던 거였다. 아이가 기존에 다니던 곳에 비하면 매우 부드럽고 가정적인 환경을 자랑한다지만, 쉬기 위해 다른 학원을 택한 아이의 삶이 슬펐다.


그다음 날 A는 부모와 싸우지 않기 위해서 학원에 일찍 와서 혼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텅 빈 강의실에서 홀로...      

이전 03화 큰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