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타고 흘러 들어온 엉뚱한 상상
어젯밤은 오랜만에 봄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적잖이 마음이 아릿한 날이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특별한 약속 없이 집 앞을 거닐다, 적절히 쾌적하고 시원한 바람이 콧등을 스치면 눈 앞에는 이름은 딱히 모르겠지만 운치 가득한 꽃나무가 가로등에 반짝이고 있고, 이내 자연스레 유년 시절, 지난 간 첫사랑, 설레며 건네었던 고백 따위의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맥주 한 잔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날. 그런 날이면 저도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항상 손발 끝과 가슴 깊숙한 곳이 찌릿하게 아리면서 자연스럽게 맥주 한 잔이 생각이 납니다. 표현은 이렇게 거창하게 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한 101가지 핑계 중에서 1가지가 작동한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참지 못 하고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4캔을 사서, 집으로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어제는 TV보다 평소에 잘 즐겨 듣지도 않는 라디오를 들으며 맥주가 마시고 싶더라구요.
핸드폰을 꺼내 누가 진행하는지도 모를 채널을 맞춰 놓고 맥주 한 잔을 땄습니다. ‘칙! 딸각’
그제서야 진행자의 목소리가 제 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곳도 오늘 날씨의 감성을 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여러분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시고 싶으세요?”
'이런...제길' 진행자의 멘트를 듣자마자 아무래도 오늘은 맥주 한 캔으로 못 끝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나는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할까..?’
누구나 평소에 가끔 해 볼 법한 진부하고 부질없는 상상이, 어젯밤 제게는 유달리 진지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10년 전 나를 되돌아봤습니다. 그 날의 저를 최대한 디테일하게 마주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10년 전이면, 지금과 달리 학생 신분이겠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공부를 해야 하고, 설레는 고백, 가슴 떨리는 첫 키스, 부모님 몰래 여행을 다녀오고, 이별의 상처에 눈물 흘리며 술에 취해 다음 날 후회할 걸 알면서도 전화를 걸고,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한숨 가득한 걱정도 하고, 딱히 정해진 꿈은 없고, 꿈이 없는 그런 내가 볼품 없이 느껴지고, 혹시 모르니까 남들이 갖춘 스펙도 쌓고, 용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해야 되고....
이상했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평소에 10년만 어리다면.. 5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왔지만, 어제는 이상하게도 좋았던 기억보단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욱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에 100% 만족하면서 사는 것도 아닌데, 나이를 드는지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몸매도 피부도 중력의 흐름에 따라 발 끝을 향하는 것같아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는 주말이라고 사람 많은 번화가보다는 조용한 선술집이나 흐느적한 느낌의 바가 좋을 만큼 에너지의 방출량 자체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세월의 무상함에 가끔씩 울적한데도 불구하고,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10년 전의 내가 마냥 좋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맥주 한 캔을 마저 다 비우고, 다음 잔을 땄습니다. ‘칙 딸깍’
10년 전을 돌이켜 봤을 때 왜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까 하는 의아함을 분석하며 두 번째 캔을 들이켰습니다.
발칙한 상상을 유도하는 진행자의 질문의 총성이 탕! 하고 터지자 마자 동시에 의식의 출발선을 뛰쳐 나온 생각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무엇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였습니다. 현재의 시간에서 나의 정신이 10년전 오늘로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의 나인 것인가? 미래의 나인 것인가? 무척이나 복잡한 상상이지만 한가지는 명료했습니다. '과거의 내가 변화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고 그 말은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10년전의 내가 나였기 때문에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것이 제 생각의 결론이었습니다.
물론 10년, 20년이 더 흘러서 육체적으로 늙고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칠 때가 온다면, ‘10년만 젊었으면..’ 하는 상상을 절절히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10년 동안, 저는 지나간 10년보다 지금과 앞으로의 10년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 왔더군요. 비록 육체는 나이를 먹어 늙고 지쳐 가겠지만, 정신만큼은 어떤 생각의 양분을 먹고 사고하는지에 따라서, 훗날 노년이 되더라도 의식만큼은 20대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부의 주름이 늘어가는 것은 죽을 만큼 두렵고 감내 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뇌의 주름은 어차피 보이지도 않으니 짜글짜글 해지는 것도 여간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세 번째 캔은 따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의 센치함도 좋지만 제게는 지금보다 중요한 내일이 있으니까요.
'지나간 시간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 라는 보편적 진리를 풍미 진하게 상기시켜주는 좋은 봄, 저녁, 바람, 이름 모를 꽃나무, 라디오, 그리고 맥주 한 잔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10년 전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엇을 하시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