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카페 테이블 맞은편의 미경이 짙은 당혹감을 드러내며 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결혼 이야기를 막 꺼낸 참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요즘 내가 좀 소홀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결혼은 언젠가 꼭 너랑 하고 싶었어."
"…진심이야?"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낳아서 같이 키우자. 나, 좋은 아빠 될게."
찬우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한껏 진지하게 대답했다. 미경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녀는 믿고 싶을 게 분명했다. 찬우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런 미경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지금 베이커리에 대해 알게 되면 혼자 몰래 가서 낙태를 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모든 게 물거품이었다. 찬우는 어젯밤 오 드 쥬방스에서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제빵사가 찬우에게 내민 계산기에는 '1,220,311,793’ 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찬우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하나 짚으며 단위를 세 보았다.
"일, 십, 백, 천…"
"12억 2,031만 1,793원이십니다."
믿기 힘든 금액이었다. 태아를 파는 댓가로 이 큰 돈을 받을 수 있다니. 심지어 수술도 공짜로 해주면서 말이다. 찬우의 생각을 읽은 듯 제빵사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 같았다. 평생 일해도 모을까 말까 한 액수였다. 찬우는 어떻게든 미경의 뱃속 태아를 팔아야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그럼 부모님한테는 언제 말할까?"
예상한 질문이었다. 찬우는 고개를 저으며 미리 준비한 대답을 늘어놨다.
"우리 아직 학생이잖아. 주변 시선도 안 좋을 수 있으니까, 일단 숨길 수 있을 때까지는 숨겼으면 해."
"하지만 결혼하려면 부모님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배가 불러오면 어차피 아시게 될 거야. 그때 가서 털어놔도 늦지 않아. 아이가 있는 걸 알면 결혼도 도와주실 수밖에 없을 거고."
그 말에 미경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래, 맞아.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으니 엄마, 아빠가 알면 낙태하라고 할 지도 몰라."
낙태라는 단어에 찬우는 마음이 찔려 흠칫했다. 그는 일부러 미경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다 너랑 아기를 위해서야. 일단은 비밀로 하자."
"응, 알겠어."
비열한 미소가 찬우의 입가를 스쳤다. 진짜 계획은 20주가 지나고 나서 털어놓으면 된다. 그땐 합법적인 낙태가 불가능해져 미경에게도 선택권이 없을 테니까.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만, 그게 대수냐. 둘이서 나눠가져도 6억이 넘는 돈이었다. 그녀도 분명 납득할 것이다.
4개월 후
찬우는 복잡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왁자지껄한 교실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의도대로 여자친구 뱃속의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20주차를 불과 이틀 앞두고 있었다. 곧 모든 계획을 털어놓고 베이커리에 태아를 팔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 며칠 사이 미경이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때 교실 앞문이 열리고 교사가 들어왔다. 오 드 쥬방스 괴소문의 중심이었던 노처녀 여교사였다. 그녀를 본 유택이 찬우를 툭툭 치며 소곤거렸다.
"야, 저거 봐. 어딜 봐서 그 할망구냐고?"
찬우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교탁을 쳐다봤다. 칠판 앞에 서 있는 여교사는 이제 거의 스무 살로 보이는 외모였다. 지난 4개월 사이 그녀는 점점 더 젊어졌다. 몰라보게 탱탱해진 피부와 혈색은 이제 신임 교사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아기를 몇 명이나 잡아먹은 거야?"
그녀의 소문은 퍼질 만큼 퍼져 학생과 교직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된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는 젊음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찬우는 수업 중인 여교사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저 여자는 그 큰 돈을 어디서 났을까? 저렇게 효과가 좋은 제품이라면 분명 태아로 만들었을 터였다. 찬우가 제시 받은 어마어마한 재료값을 생각하면 특제 빵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을 게 분명했다.
"사채라도 쓰는 모양이지?"
찬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렴 어떠랴. 저렇게 빚을 내서라도 사먹는 사람들 덕분에 그는 곧 돈방석에 앉을 것이었다. 수업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책상 밑으로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미경에게선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찬우와 유택은 하교 중인 학생들 사이에 섞여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찬우는 내내 미경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핸드폰에선 부재중을 알리는 안내 음성만 연신 흘러나왔다.
"아직도 안 받아? 싸웠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경은 배가 불러올수록 찬우에게 더 의지했다. 그녀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세 사람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화목한 가정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미경에게 꿍꿍이를 털어놓고 빵집에 데려가 수술 예약을 했어야 했다. 찬우는 걸음을 멈추고 불안해하며 서성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길을 돌려 뛰어갔다.
"야, 어디가?"
찬우는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오 드 쥬방스를 향해 달렸다. 혹시 예약 스케줄이 꼬여 차질이 생기면 곤란했다. 혼자라도 가서 날짜를 잡아놓을 생각이었다.
잠시 후 그는 베이커리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빵사가 기다렸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며 반겼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몇 달 전에 잠깐 찾아왔던 나를 기억하는 건가? 찬우는 의아했다.
"빵 사시려고요?"
"아니요, 거래 예약을 하려고 왔는데요. 여자친구가 막 임신 20주차거든요."
제빵사의 입가에선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찬우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그는 재차 질문했다.
"가능한가요? 금액은 그때 말씀해주셨던 그대로 맞죠?"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거래가 힘들 것 같습니다, 손님."
제빵사가 번지르르한 말투로 대답했다. 찬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죠?"
"태아 특제 빵의 경우 제조가 꽤 까다로운 편이라 분기별로 한 번씩만 만드는 게 원칙입니다만… 하필 내일 수술 예약이 잡혀버렸지 뭡니까? 막 20주차 된 태아를 팔겠다는 분이 오셔서요."
"그럴 수가…. 내일이요?"
찬우는 낙심했다.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하루 차이로 선수를 빼앗기다니. 하지만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어떻게든 거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24주가 지난 상태에선 얼마나 받을 수 있죠?"
"물론 원래 금액은 못 드리지만 값은 쳐드려야죠. '생명과 젊음'을 파신다는 게 가벼운 일은 아니니까요."
제빵사는 계산기를 꺼내 타닥타닥 두드렸다. 그리고 찬우에게 내밀어 숫자를 보여줬다. '302,910'이라는 숫자가 입력돼 있었다.
"30만 원이라니 너무 적잖아요."
"유감입니다만 이 가격이 최선입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말없이 가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찬우는 기운 빠진 표정으로 터덜터덜 골목을 걷고 있었다. 손에 쥔 핸드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찬우는 저 멀리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미경이었다. 그녀는 찬우를 보고 몹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분명 최근까지 눈에 띄게 불러오던 미경의 배가 거짓말처럼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미경아. 어떻게 된 거야? 너, 설마…"
미경은 못 들은 척 가방을 끌어안더니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찬우는 뒤따라 쫓아갔다.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 미친 듯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야! 양미경! 거기 서, 이 도둑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