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화가 났다
벨루치언니가 바르셀로나에 살았을 때부터 좋아하던 타파스바가 있었다. 오기 전부터 꼭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첫날은 만석이라 실패.
둘째 날은 일찍 가서 예약을 하려 했는데 예약은 안 받는단다.
일찍 와서 먹으면 자리가 있을 거라고 직원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페인사람들이 밥 먹는 시간보다 훨씬 이른(?) 9시에 도착했다(평소의 나에게는 9시면 소화가 한참 전에 다 됐을 시간이지만 말이다)
도착했는데 이게 웬걸. 사람들이 또 바글바글이다. 이곳은 언니가 바르셀로나를 떠난 그 사이에 관광객/인플루언서들이 즐겨 찾는 핫플이 된 것이다. 앙헬이 들어가서 자리가 있냐고 물었고, 화장실 앞의 테이블에서 앉아서 기다리면 다른 자리를 주겠다고 한다.
벨루치언니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추억의 장소를 인플루언서들에게 뺏겨서일까?? 직원이 오더니 주문을 받는다. 우리는 타파스 몇 개를 주문했다. 우리는 테이블을 바꿔주고 그 뒤에 음식을 갖다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리를 바꿔주겠다더니 화장실 앞 테이블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가.
벨루치언니가 말했다.
아까 자리 바꿔준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자리가 없어서 다른 자리를 줄 수가 없다고 한다.
시킨 음식들은 이미 나와서 다른 식당으로 갈 수도 없다.
음식이 맛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화장실 앞에서 먹는 음식이라 식욕이 가셨다. 게다가 언니가 살 때랑은 맛도 많이 변했다 한다.
심기가 불편해진 언니는 표정이 더 안 좋아진다. 하지만 즐겁게 먹으려 노력해 본다.
이곳은 70년이나 된 타파스바인데 언니가 살 때는 동네 사람들이 자주 찾는 그런 조그마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꽤나 유명해져 스페인사람들이 밥 먹지 않는 시간에도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내가 한국에 갔을 때 명동에서 느꼈던 그 기분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아 언니가 이해가 간다. 내 청소년기에 얼마 되지 않는 용돈으로 명동의류에 가서 정말 거저나 마찬가지였던 털모자나 악세사리를 사서 행복해하고, 친구와 함께 노점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사 먹으면서 느꼈던 즐거움과 추억.
이번 한국 방문에 들른 명동은 그때의 명동이 아니었다. 관광객들이 점령을 했다. 노점도 노점이 아니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국적불명의 음식을 말도 안 되는 금액에 팔았다.
지금 언니는 아마 내가 명동에서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게다가 사람들이 화장실을 가는데 자꾸 문을 열어놓고 다녀 정말로 거슬렸다. 나는 언니의 얼굴이 저 그림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언니가 화장실 갔다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 밥 먹고 있으니까 화장실 문 좀 닫고 나와주실래요?
붐비고 인기 있는 곳이니 한 사람만 화장실을 가진 않는 게 당연하다. 다섯 명째 문을 닫아달라 얘기하는 언니를 달래 본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언니가 한 부탁에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다.
언니, 어차피 저 사람들 우리가 무슨 얘길 해도 안 들을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시킨 거 먹고 나가자.
나 성질로는 안 지는 이태리여자야,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이탈리아인의 다혈질성미는 한국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내가 말렸지만, 언니는 얼굴이 점점 더 뻘게지며 열다섯 번째 사람에게 문 좀 닫으라고, 우리 밥 먹고 있다고를 반복했다. Angry 단계를 넘어서서 이제 furious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대로 두면 아마 20명째에서 explosion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폭발!
앙헬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먹어! 대충 먹고 나가야지 안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빨리 입에 털어 넣고 나가자.
그렇게 우리는 벨루치언니를 끌고 이제는 언니의 한 때 가장 좋아했던 타파스집이 된 곳에서 나왔다.
어느 뉴스에서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관광객들을 물총으로 공격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오버투어리즘 반대 시위도 가끔 일어난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월세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고 오늘처럼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 관광객으로 꽉꽉 들어 타면 분명히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경우는 레스토랑에서 자리가 없다고 우리를 보냈더라면 이렇게 기분 상해서 나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누군가는 오버투어리즘으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이 걷고 엄청나게 스펙타클한 볼거리가 많았던 하루, 하루의 끝이 이렇게 폭발직전의 이태리언니를 구슬려가며 호텔에 돌아가는 게 아쉽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바르셀로나의 태양이 뜨겠지. 내일은 나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