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함박꽃

by 고추장와플

아직 자기가 이곳에서 몇 년을 살 거라는 걸 모르는 아이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서울에서부터 입고 온 원피스와 샌들을 아이는 할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사달라 조르고 졸라도 꿈쩍도 하지 않던 부모는 원피스와 샌들을 아이에게 사 주었다.


할머니의 손은 항상 고된 일로 퉁퉁 부어 있었고 그 꺼끌꺼끌한 손으로 아이를 쓰다듬었다.

꺼끌꺼끌하지만 할머니의 손길은 솜사탕만큼 부드러웠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아이는 기다리다 지쳐 할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언제 와?

낭중에 온디야. 낭중에...


할머니는 세상이 여전히 잠에서 깨기 전, 아직 하늘이 회색 빛이 돌 때 경운기를 타고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바지락을 잡으러 나갔다.

할머니가 없는 사이 아이는 어린이집 대신,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들이 엄마고, 산이 아빠였다.


냉이를 캐고, 들풀로 반지를 만들고, 하늘을 보며 할머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집에 있는 누렁이와 염소는 아이의 친구였다.


할머니는 바다에서 돌아오면 갓 잡은 바지락으로 국을 하고, 우뭇가사리 무침을 했다.

아이답지 않게 아이는 바지락국을 훌훌 마시고, 미끌거리는 우뭇가사리를 야무지게도 먹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손잡고 고추밭에 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할머니, 빨간색 고추만 따는 거지? 나도 도와줄게.

그려. 빨간 것만 따야 혀. 근디 꼭다리 위도 같이 따야 혀. 아이고, 잘햐.


아이가 흔치 않은 시골동네에 아이가 지나가면 동네 할머니들이 버선발로 나와 반기며 소중히 감춰 놓았던 베지밀과 박하사탕을 내어준다.

고쟁이 안에 숨겨 두었던 박하사탕은 눅눅해졌지만 사탕구경하기 어려운 이곳에서 아이의 입에는 달게만 느껴졌다.

하루에 버스 네 대가 들어오는 이런 구석진 시골에서 사탕은 귀한 물건이었다.

마을에 있는 유일한 구판장도 작은 아이의 걸음으로는 30분이 걸렸다.


구들장이 뜨끈뜨끈 했던 겨울, 코는 시리고 엉덩이는 뜨거웠다.

아이가 놀다 낸 문풍지의 구멍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할머니는 퉁퉁한 손을 아이의 배 위에 얹으며 아이를 재웠다.


봄이 왔다.

집 옆에 뻐꾸기 둥지에서 뻐꾹뻐꾹 새소리가 났다.

꽃들은 활짝 피었고, 아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할머니 이 꽃은 뭐야?

이, 이 꽃은 함박꽃이여. 꽃이 크잖여. 그러니께 함박꽃인겨.


할머니, 이 꽃은 뭐야?

이, 이 꽃은 밥풀같이 생겨서 밥풀꽃이여. 밥풀 같제?


일 하느라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할머니는 꽃이름을 마법처럼 척척 지어냈고, 아이는 할머니집 뒤뜰에 있던 함박꽃과 앞마당에 있는 밥풀꽃을 참으로 좋아했다.


다 커서 어른이 된 아이는 아직도 모란꽃, 박태기꽃 보다 할머니가 지어 준 함박꽃, 밥풀꽃이 이 꽃들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이곳이 따듯하고 좋았다.

할머니의 퉁퉁한 손이, 동네 할머니들이 내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이 좋았다.

여기서 계속 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맘 때가 되면 아이는 아직도 할머니의 바지락과 우뭇가사리 무침을 생각한다.

봄 냄새는 할머니의 퉁퉁한 손을 생각하게 한다.

퉁퉁하지만 부드러운 할머니의 손길을.

할머니의 고추밭을, 할머니의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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