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국제연애 끝에 벨기에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작별 후, 눈물에 불어서 퉁퉁 부어 떠지지도 않는 눈을 하고 비행기에서 내린 것도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벨기에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는 유교녀, 색목인을 만나다 에서 보시길.)
사랑하나 만 보고 이곳까지 왔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눈앞에 닥치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나는 남편의 월급을 잘 운용할 재주가 없었고, 내 일을 가지고 싶었다. 국제결혼을 준비 중이신 분들은 잘 생각해 두셔야 할 것이, 서구권에서는 여성이 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남편의 월급의 액수와는 관계가 없다.
내 돈을 쓸 때는 영어를 써도 사람들은 친절하다. 그러나 내가 소비자에서 노동자의 입장으로 바뀌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돈을 벌려면 네덜란드어를 해야 한다. 생소하기만 한 네덜란드 말을 쓰는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던 날 들도 지나갔다.
엊그제 같던 그날들은 순식간에 지나, 지금은 고추장와플주니어 1호와 고추장와플주니어 2호의 엄마이자, 벨기에의 대학에서 사서로서 학생들에게 과학적인 글쓰기 방법과 데이터의 정밀률과 재현율을 이상적으로 찾아내는 강의를 네덜란드어로 하고 있다.
결혼과정만큼이나, 이 와플국에 적응하는 과정도 험난했다. 매우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집에서 자라, 와플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고, 언어도 어려웠고, 날씨조차도 정말 구리디 구렸고, 혁신과 변화는 눈곱만큼도 원하지 않는 유럽최강의 구닥다리 기술과, 민원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행정처리에도 질려버렸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이해한다.
내가 욕을 싸질렀던 행정처리자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어보니 결국 월급쟁이는 다 똑같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한다.), 그들의 구닥다리 방식을 옹호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유튜브에서 유명해진 에버랜드 소울리스좌 직원처럼, 나는 벨기에의 철밥통/고인물 공무원/사서가 되었다.
에버랜드 소울리스좌처럼 와플국 고인물이 되어버렸다. (출처: 유튜브 티타남 채널 캡처)
앞으로의 글 들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이야기를 꼰대가 아닌 것처럼 써내려 가려한다. (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에게 꼰대같은 훈수를 두려고 한단 말인가. 나는 그냥 내 이야기를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아무나를 위해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