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유교 숭상주의자이다. 여자는 깜깜하기 전에 집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대학 4년 내내, 아버지 차를 타고 학교에 가서, 강의 마치면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돌아갔다. 나는 우리 과에서 나름 유명했다. 아버지가 엄해서 강의 끝나면 바로 집에 가는 아이로 말이다.
엄한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자유를 주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폭발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하고 난 이후,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마침 또 독립 한 곳이 홍대 근처였다... 밤의 홍대는 신세계였다. 나는 깜깜해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금, 토, 일을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대학을 졸업하고서야 늦바람이 든 것이다. 친구는 닮는다고 했던가. 우리는 클럽에 가서도 서로를 밀착방어했고, 정말로 춤만 췄다. 어느 낯선 이 가 부비부비를 할라치면 내 친구와 나는 서로를 보호하며 낯선 이를 밀어냈다. 놀 기회가 생겨도 조선멘탈은 어딜 가지 않았다.
그리고 벨기에에 이사를 와서도 나의 조선멘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어 어학원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와 말도 잘 통하고 재미있어서 나름 친하게 지내던 차에, 그 친구가 함께 클럽에 가자고 제안했다.
벨기에 클럽은 가본 적 없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한국 홍대의 클럽에 가본 적이 있는 나였다. 그래서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남편 있는 여자가 어디 클럽이냐고 하겠지만, 남편은 내가 진심으로 춤만 추다가 올 것을 알기에, 친구랑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 매력적인 미국인 친구도 결혼을 해서 벨기에서 사는 친구였다. 같이 만나 클럽에 들어갔다. 외국의 클럽에 처음 와 봤다. 신기하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 다른 건 아니다. 외려 어떤 면은 홍대가 더 멋진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또 한 명의 에콰도르 친구를 포함하여 여자 셋이 놀러 왔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나는 너무도 순진했고 내가 사심이 없으면 남들도 사심이 없을 것이라 믿었고, 얘들도 나의 한국 친구처럼 서로를 보호하며 우리의 우정을 다질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 정말 바보였나? 싶다.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을 때, 나의 미국인 친구에게 어떤 놈팽이가 다가와 질척댔다. 그래서 나는 정의감에 불타 친구를 구해주기로 했다. 둘 사이에 가서 친구를 밀착마크 했다. 절대로 저 놈팽이에게 틈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그리고 내 딴에는 여자 셋이 재밌게 놀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친구를 구해줬다는 사실에 좀 으쓱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그 미국인 친구는 나를 피했고, 같이 뭘 하자고 해도 바쁘다고 했다. 거리를 두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기에 같이 클럽에 갔던 에콰도르 친구에게 물어봤다.
나: XX가 왠지 요즘에 나를 자꾸 피하는 느낌이야.
에콰도르 친구: 사실은 그 친구가 나한테 너랑 같이 못 다니겠다고 했어. 기분전환 삼아 남자들이랑 춤추자고 놀러 간 건데 네가 자꾸 막아서 기분이 나빴대.
나: 근데 결혼했잖아.
에콰도르 친구: 결혼하면 기분전환 하려고 남자들이랑 춤도 못 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엥? 내가 XX를 구해 준 것 아니었어? 내가 기분전환 삼아 놀려는 데 방해를 했다고? 아니 결혼도 한 아녀자가 왜 모르는 남자랑 춤을 춰?
이거야 말로 레알 유교가정에서 자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잠시 한국에서 허락되었던 나 혼자 살았던 시절에도 아버지의 아녀자의 행실에 대한 주입식 교육은 홍대의 클럽에서도 살아있었고, 그 먼 지구반대편의 벨기에 클럽에서도 내 피에 녹아있었다. 결혼한 아녀자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추러 클럽에 온 다는 것은 나는 생각도 못했다. 그냥 춤과 분위기를 즐기러 온 다고 생각했는데... 서양에서는 결혼하고도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출 수가 있나 보다.
그리하여 나는 개방적인 미국인 친구에게 이러한 이유로 손절을 당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사실, 기분전환하러 남자랑 춤을 추러 클럽에 간 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다만, 사람은 다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본인이 아니면 남을 100프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