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브런치북을 연재하면서 어떠한 어투로 글을 써야 할까를 잠시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간 제 유교녀, 색목인을 만나다와 유교녀 벨기에 생존기를 한편이라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스타일이 그닥 진중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울리는 어투는 아닙니다.
가장 친애해 마지않는 제 친구는 제 브런치북을 읽더니, "네가 내 귀에다 대고 읽어주는 느낌이야. 그냥 딱 네 말투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말투는 원래 이렇습니다. 네덜란드어를 해도 이런 말투고, 영어를 할 때도, 이탈리아어를 할 때도 이렇게 방정맞습니다.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로 워크숍을 할 때도 이런 식 방정맞게 설명을 해서, 키득키득 웃고 난리도 아니지만은 방정맞음이 제 속에 숨 쉬고 있어 넣어 두기가 곤란합니다. 남 웃기는 게 좋으면 사서 말고, 코미디언을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어차피 저 힘들 때 보려고 쓰는 글, 저답게 방정맞게 쓸게요. 대신 독자님들과 함께 하자는 목적도 있으니, 방정맞은 존댓말로 쓰겠습니다. 제 방정맞은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잡초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꾸지 않아도 알아서 자라는 풀이라는 점과 다른 작물의 성장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죠.
두 번째 사실은 잡초예찬론자로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예, 모든 식물은 옆에 같이 심어 놓으면 둘 다 잘 안 자랍니다. 그게 장미든, 수선화든 잡초 든요. 그러니까 잡초에게는 장미나 수선화가 잡초가 될 수 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잡초는 달라지는 것이지요.
혹시 랄프 왈도 에머슨을 아시나요?
랄프 왈도 에머슨에 대해 설명을 드릴 것 같으면, 이 분은 미국 철학의 시조새 같은 분입니다.
미국정신의 주춧돌이 된 사람이지요.
쉽게 그림으로 설명드리자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초월주의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자연에서의 목가적인 삶을 그린 미국의 대표적 수필집 월든을 집필한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도 절친이었습니다. 자연에서의 삶과 평범함을 예찬한 미국의 시조새 두 분 되시겠습니다. (미문학의 단군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왜 이 사람 이야기를 했냐 하면요, 잡초에 관해 아주 아름다운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이 분은 평범한 것의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긴 분이셨죠.
"홧 이즈 어 위드? 어 플랜트 후즈 벌츄스 해브 낫 옛 빈 디스커벌드."
잡초는 아직 장점이 발견되지 않은 식물이라고 시조새님은 말했습니다.
잡초는 가능성이 아직 무궁무진 한 식물인 것이죠. 다만 우리가 모를 뿐...
아름다운 꽃은 꺾여 꽃병 안에 놓였다 일주일 뒤면 쓰레기통으로 갑니다. 저는 밟히고 또 밟혀도 결국 꽃을 피워 더 번성해 나가는 잡초를 예찬합니다.
어리든, 나이가 지긋하건, 아름답건, 아름답지 않건,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람이건 아니건, 우리 모두가 넘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그 가치가 무궁무진한 존재들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