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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하 Oct 30. 2022

추모할 만한 죽음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이태원 사태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어제 네이버 웹 소설이나 보다가 평소보다 일찍 침실의 불을 껐다. 나름 푹 잤음에도 좀 더 잘까 고민이나 하고 있었다. 이태원 사태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피해자 수를 듣는 순간 '내가 뭘 들었지' 싶었다. 2022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뉴스와 SNS를 찾아보면서 점차 그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몇몇 회사 동료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중 아직 20대인 후배는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간다고 했다. 메시지를 남기고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아...'라는 신호음만 돌아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진동 소리가 울리면 스마트폰을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답장이 왔다. 사태 전 날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있었다고 했다. 다른 동료도 늦잠을 자느라 연락이 늦었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 핼러윈을 즐겼다는 지인, 이태원에 갔지만 하루 차이로 사태를 피했다는 친구들의 생존 신고가 이어졌다.  


그 짧은 순간, 가족이 아닌 사람들임에도 연락이 되질 않자 속이 타들어갔다. 나만 해도 이런데, 유족들의 심정은 감히 지레짐작할 수조차 없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피해자들을 조롱했다. 그런 글은 일부 폐쇄적인 커뮤니티에서만 돌았기 때문에 차라리 다행이었다. (누가 트위터에 그 글을 캡처해서 공유한 것을 봤다.) 더 문제는 "놀러 가서 사고를 당한 사람을 왜 애도해야 하느냐"는 글이었다. 네이버 뉴스 댓글 란이라는 공개적인 장소에 버젓이 걸려 있었다. 그들은 당당했다. '누가 놀러 가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제는 죽음을 추모하는 것조차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모든 죽음을 추모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도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일리는 있다. 범죄자나 원수의 죽음까지 추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죽음의 이유가 그 기준선이 될 수는 없다. 놀러 가서 사고를 당했다는 이유로 추모의 대상에서 배제된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떤 죽음만을 추모할 수 있을까? 아프다 죽은 사람? 출근하다 죽은 사람? 일하다 죽은 사람? 그렇게 하나 둘 배제하다 보면 우리는 극히 일부의 죽음만을 추모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나중에는 '(생판 모르는 타인 중) 몇 명 이상을 구하다가 죽은 경우'에만 추모받을 자격을 지닐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어떻게든 죽는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마지막이 영화의 한 장면과 같기를 원하겠지만-평생을 함께 한 사람의 어깨에 기대 잠들 듯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전혀 모르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거나, 아니면 국가를 지키다 장렬히 전사하거나- 실제로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가다가 차에 치이거나, 술 취한 채로 바르게 누워 자다가 토사물이 목에 걸리거나- 굳이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죽음에 이르는 원인은 다양하다. 추모의 기준을 세운 사람조차도 본인이 어떻게 죽을지 자신할 수는 없을 테다.


물론 주장이라고 할 수 없을, 한낱 인터넷 데이터 쪼가리에 이렇게 글까지 쓰는 게 과민 반응인 것은 알고 있다. 사실 길게 썼지만 다음의 한 문장만 읽으면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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