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일기 4

by 박상진

요즘은 보통 사나흘 미뤄가면서 면도를 한다. 게을러진 탓도 있지만, 면도기를 들다가도 도통 얼굴 내밀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또 하루를 거르고 마는데 바로 그런 날이 오늘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운동이나 하러 갈까 고민 끝에 트레이닝복으로 막 갈아입으려는데 휴대폰 화면이 밝게 켜진다. 바지를 반쯤 입다 말고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구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온 것이다.


"10시 환호공원 도착. 시간 있는교?"


시간이 있고 말고 가 어디 있겠는가!


"ㅇㅇ, 그때 보시더. 도착하면 전화하소. 환호공원에 있을란께. 혼자 오시는교?"


늘 하던 대로 편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뒤이은 친구 말에 따르자면,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길이라서 망설임 끝에 연락을 취한 것이란다. 망설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 나야, 마침 그쪽으로 운동을 나가려던 참이었으니 어르신들께 인사 올리고 잠시 주변 안내를 해 드린 뒤 가던 길 가면 되는 것이다.


친구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거제도로 가서 그곳에 있는 리조트에서 하루를 묵기로 계획해 두었다고 한다. 여러 곳의 경유할 길을 고심하다가, 마침 어르신이 스페이스 워크를 걷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Go to Pohang!'한 것인데, 나야말로 'Welcome to Pohang!'이다. 오랜만에 친구 얼굴도 보고, 그동안 사실 근황이 살짝 궁금하기도 했던 친구의 어르신을 뵐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인 것이다!


두 분, 어르신은 구순(九旬)을 넘긴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셨다. 신체적 건강보다는 정신적인 면으로 노인의 건강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인 추세이긴 하지만, 소위 말하는 노인성 치매의 흔적조차 엿보이지 않는 두 분 모습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만 아버님의 경우, 관절 수술 후에 걸음걸이가 조금 불편하셔서 walking stick에 의탁하여 걷고는 있지만 이런 어둔한 걸음걸이마저도 내 눈에는 경이롭게 비칠 지경이었다. 사실 스페이스 워크로 올라가는 지름길로 등산로를 택했을 때는, 완만하기는 해도 살짝 가파른 경사가 젊은이들조차 약간 숨이 찰 정도는 되기에 슬며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몇 발작 앞장서서 걸음을 조금씩 늦춰가며 걸음걸이의 보조를 맞추고 있었는데, 두 분의 숨이 너무 고르신 것이 마치 평지를 걷고 있는 듯했다. 친구는 어슬렁어슬렁 딴청을 부리며 두 분 뒤를 따르는데 그 기색이 얄밉도록 천하태평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여동생들과 함께 주왕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숙소에다 짐을 풀어놓고 곧장 주왕산으로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처음부터 심상찮았다. 사실 아버지를 동반하는 산행은 처음이었기에 며칠 전부터 마음이 줄곧 설레었던 터라, 혹시라도 도중에서 산행이 그르쳐질까 싶어 부쩍 조바심이 났다. 게다가 오줌이 자주 마려우신지 몇 발짝만 떼시면 곧장 화장실을 찾으시는데, 이럴 때면 혹시라도 가는 중에 실금(失禁)이라도 하실까 봐 오히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결국, 주차장을 지나 상가로 접어드는 갈림길에서 되돌아 설 수밖에 없었는데, 마음속으로 아쉬움을 눌러가며 멀리 보이는 주왕산을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때는 내가 너무 서둘렀던 거야. 아버지는 경증의 치매를 앓고 계시긴 하여도 이지(理智)가 흔들릴 만큼 정신이 혼란스럽지는 않으셨는데, 그만 미리 성급하게 판단해버리고 말았어. 그냥 지켜보았어야 했는데. 맞아! 하고 싶은 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던 거야.'


지난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회한(悔恨)이 밀려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질 않는데. 우리랑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이젠 아무것도 없는데.


스페이스 워크에 이르니, 마침 10시가 되어 미리 줄을 선 순서대로 입장이 시작되었다.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섞어, 입구에서 안내 중인 자원봉사자에게 진심으로 물어본다.


"스페이스 워크를 만든 회사의 대표이사가 우리 고등학교 친구시더. 구경시켜 드리려고 멀리서 어르신을 모시고 왔는데, 두 분 다 구순을 이미 넘기셨니더. 노부부가 구순 너머서까지 해로(偕老) 하시는 것도 드물 텐데, 스페이스 워크를 이만한 나이의 부부가 함께 오르시는 건, 이것 생기고 나서 처음 아닌교?"


처음부터 분명한 답이 있을 리 없는 질문인 줄 알고 물어보긴 했지만, 자원봉사자의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미뤄 볼 때 이미 그 답이 익히 짐작되었다. 스페이스 워크의 덜 가파른 우측 편 계단을 택해 궤도(軌道)의 정상 근처까지 간 뒤에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오는데, 여전히 친구는 모든 길의 오르내림을 두 분의 발걸음에 온전히 내맡기고 있다. 안절부절 조바심이 난 쪽은 오히려 나인데, 혹시라도 두 어르신 다리에 힘이라도 풀려 계단을 헛디디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나의 제안으로, 지난주 일반인들에게 오픈한 여남동의 스카이 워크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은 계단 길이 아니기에 노인들이 걸어도 큰 불편함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짐작했던 대로 여전히 잘 걸으시는 데다, 스카이 워크 안 쪽 바다 위에서 맞는 바람을 무척 즐기시는 듯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는데, 거제까지 가야 할 길이 멀어서 다 돌아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그만 돌아서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어르신이 해안 둘레길 안내도(案內圖) 앞에 멈춰 서더니 한참을 요모조모 살피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떠날 때 안내 지도를 주의 깊게 살피는 여행자는 반드시 훗날을 기약한다!' 다시 말해,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으로 반드시 되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친구는 그런 어르신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 평소의 관심사이며 버릇이라고 귀띔했지만, 나는 부디 몇 번이라도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건강하시기를 축원했다. 어르신이 젊어서부터 대구 서문 큰 장에서 일궈오신 가업(家業)이 친구의 손을 거쳐 손자에 이를 때까지 삼대에 걸쳐 무탈하게 이어 온 만큼, 이젠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마음 편히 여생을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저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 길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오늘은 왠지 멀고도 허전하기만 하다. 울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지면서, 순간 사방이 고즈넉해지며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스카이 워크 《친구 가족 뒤로 포스코가 보인다.》

스페이스 워크 《바로 뒤,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신 후 기념 촬영》

요즘 귀하신 분이 한참 노동에 열중해 있다.

스카이 워크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바닷가 산책로 정면에서 바라본 스카이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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