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二律背反)의 함정

수염의 美學

by 박상진

이율배반. 사전적 의미로, 서로 모순되는 명제(命題), 즉 정립(正立)과 반립(反立)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주장되는 일을 말한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본다. 우선 눈길이 가는 곳은 일주일 가까이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 수염이다. 좌측 귀밑머리로부터 시작해서 턱선을 따라 내려온 수염은 코 아래와 아래턱으로 이어져 우측으로 그 경계를 넓혀가는데, 말하자면 제대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양 볼 쪽으로도 드문드문 수염이 나 있는데 좀 더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그 윤곽이 제대로 살아나면 영화 어벤저스의 슈퍼히어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수염 기른 얼굴과도 조금은 닮아질 것 같기도 하다.


거울 앞에서 얼굴의 각도를 이리저리 바꾸어 가며 처음 본 사람 얼굴 대하듯 요모조모 살피는데 뭔가 모를 부자연스러움이 얼굴에서 느껴진다. 당장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괜히 떨떠름해지는 것이 기분이 별로다. 손으로 턱선을 따라 쓰윽 쓰다듬어 보았다. 사나흘이 지나 모근에서 좀 더 웃자란 수염은 이젠 더 이상 까칠하지 않아서 좋다. 오히려 손바닥에 부드럽게 어루만져질 만큼 기분 좋은 감촉으로 조금 전 영문모를 불편함을 말끔히 씻어내 준다.


다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수염을 기르지 않을 때보다는 잔주름이 많이 가려져서인진 몰라도 조금은 더 얼굴이 젊어진 듯 보였다. 보통 이삼십 대 수염 기른 사람들의 경우, 제 나이보다 좀 더 윗보는 것과는 반대인 것이다. 다시 얼굴을 위아래로 쓰다듬는데, 손바닥 아래로 슬금슬금 감춰지는 수염의 색깔이 거의 다 은빛 일색이다. 아하! 그것이었구나. 좀 전 느꼈던 위화감, 왠지모를 부조화는 바로 머리 색깔과 수염 색깔이 이처럼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구나.


나이가 들면서 머리숱은 예전 같지 않지만, 아직 난 새치조차 그다지 없는 검은 머리다. 머리카락에 힘이 없고, 정수리가 듬성듬성해지긴 했어도 염색 한 번 안 한 검은색 머리 하나로 지금껏 잘 버텨왔기에, 이 만한 나이에 들어서도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그런데 모처럼 길러 본 수염 색이 온통 은빛이라니!


사실 마흔 넘어서부터는 수염이 얼핏 봐서도 잿빛을 띠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매일 하는 면도를 지나친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여태껏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 거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건 코털도 마찬가지였는데, 한 번은 교무실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젖혀 눕다시피 하고 편히 쉬고 있을 때, 학생이 급히 나를 찾았다. 이놈은 날 보러 온 목적을 잠시 잊은 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생뚱맞은 말을 불쑥 내뱉었다.


"쌤요! 샘 머리는 아직 꺼먼데 코털은 왜 허옇게 싯는교?"


자세를 고쳐 앉으려던 중에, 기가 차서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이 놈이 보자 보자 하니 이젠 내 콧속까지 다 들여다보는가 보네.', 마구 쏟아져 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키면서 외려 능갈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정도 말에 지네들처럼 얼굴 붉혀가며 핏대를 세울 순 없지 않은가!


"야, 일 마야! 그러게 고만 속 좀 덜 썩이제. 선생님이 겉은 멀쩡해 보여도 니 놈 보다시피 속은 하얗게 다 싯는 기라!"


멀쑥해진 놈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꽁지 빠진 개처럼 꼬리를 말며 오던 길로 곧장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자신의 눙치는 말에 대한 반응을 엿보다가 웬만하면 야간 자율학습 조퇴라도 허락받으려던 심산이었으리라.


정말이지 머리털은 검은색인데, 왜 일찍부터 코털이 먼저 새하얗게 세어버렸는지는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머리 색깔은 여전히 검은색으로 멀쩡한데 수염마저도 이렇게 이제 은회색으로 물들어버린 것이다.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는 드러내 놓고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잔뜩 쌓여 있는 것일까?


머리카락 숱이 많고 짙을 때, 이를테면 내 젊음이 가장 눈부시게 빛 날 때 한 번씩 길러 본 검은색 콧수염은 나를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반면, 이 나이 들어 비록 머리숱이 듬성하긴 하나 여전히 검은 머리에 텁수룩하게 기른 은회색의 얼굴 수염을 보고는 오히려 날 보고 젊어 보인다 한다. 이율배반적이다. 그리고 어느덧 난 그 함정에 빠져있는 듯하고, 때론 이를 즐기고 있다.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만 것이다.


다시 거울을 본다. 마음속으로 면도칼의 날을 잔뜩 벼르고선 구레나룻으로부터 턱수염에 이르기까지 어지럽게 마구 자란 수염에다 선명하게 이랑을 만들고 올곧게 골을 내었다. 이렇게 하면 한층 더 젊게 보일 수도 있으려나? 하지만 거기까지다. 머릿속 생각이라도 더 이상 나아갈 용기는 없는 것이다. 평생을 이런 식의 얼굴 치장과는 담을 쌓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이 분명하다. 말년의 신성일이 문득 떠오른다.


신성일은 당대의 알아주는 미남배우이고 평생 온갖 염문을 뿌려 온 사람이다. 특히, 자신의 애정행각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밝히는데도 스스럼이 없었다. 모르긴 해도 오히려 자신의 그런 행위에다 로맨스란 허울을 덧 씌워, 옳고 그름에 대한 대중들의 판단을 희석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이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내로남불이며, 이율배반이다. 그 역시도 이율배반의 달콤한 함정에 깊숙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웃자란 수염을 실제로 깎아보면, 면도날이 바로 수염 난 피부로 파고들지 못하고 마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길 때처럼 잠시 날에 수염이 끌려온다. 까칠하니 자잘한 통증이 뒤따르고 면도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서걱서걱 칼질하는 소리도 난다. 기분 좋은 몰입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제 곧 면도가 마저 끝이 나면 익숙한 거울 속 얼굴이 환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맞이할 것이고, 즐거워진 마음으로 난 한 잔의 모닝커피를 기꺼이 마실 것이다


다시 며칠의 거리가 주어지면 내 얼굴엔 봄날의 들꽃처럼 수염이 온통 자라 있을 것이다. 그 들꽃에 푹 파묻힌 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되는 꿈을 또 한 번 꿀 것이고, 굳이 신성일은 아니더라도 뭔가 모를 꿈을 좇아 걷잡을 수 없는 무궁(無窮)의 황홀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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