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페스티벌

그녀의 별이 되어 다시 만나리

by 박상진

-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였나요?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때는, 그해 가을이 막바지에 이른 11월 말쯤이었나 봐요.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때 이른 크리스마스 캐럴이 동네 전파상이나 레코드 가게에서 막 들려오기 시작했거든요. 세찬 바람이 이 골목 저 골목 후비고 지나가면서, 여기저기 쌓여있던 낙엽들이 거리로 다시 내몰리는 바람에 인적 끊어진 거리가 내 마음처럼 좀 을씨년스럽긴 했어요. 난 당시 고 3이었고, 본 고사를 앞둔 수험생이었으니까요.


- 그런데, 그녀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생 녀석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지요. 자기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동네 독서실이 본 고사를 치를 때까지 돈을 미리 다 치러 놓았다더군요. 사실, 난 뜨뜻한 방바닥에서 누워 공부하는 것이 더 편한 지라 크게 내키진 않았지만, 자신의 지정석 옆이 예쁜 여학생의 고정석이란 말에 앞뒤 가릴 겨를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전화를 받고 난 그 주 토요일 오후, 난 가기 싫어하는 사촌 동생을 꾀어 함께 독서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매너 껌도 미리 한통 사서 주머니에 넣어두고, 혹 있을지도 모를 그녀와의 첫 만남과 이후에 이어질 자연스러운 대화를 은근히 기대했다.


동창생 녀석의 고정석은, 늦은 오후의 햇볕이 유리막을 입힌 창을 통해 은은히 비집고 들어와 주인을 떠나보낸 빈자리를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그리고 옆자리에는 과연 기대한 바 대로 여자 아이 하나가 다소곳이 앉아 있기는 했는데, 좀 더 다가가 보니 양손을 베개 삼아 몸을 앞으로 웅크린 채 살포시 잠들어 있었다. 옆자리의 기척을 느꼈던지 몸을 잠시 움찔했지만 그뿐이었고, 결국은 두어 시간이 더 흐를 때까지 빗질해 뒤로 정갈하게 묶어놓은 그녀의 갈래 머리만 몰래 훔쳐볼 도리밖에 없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이미 넘어서있었고, 사촌 동생의 득달같은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없이 독서실을 나서야만 했는데,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그녀의 머리맡 영어사전 속에다 껌 두 개를 슬그머니 끼워두고 왔다.


그녀는 철벽이었다. 다음 날부터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쌓여갔지만 잠깐이라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적이 없었고, 옆자리에 앉았다 해서 낯 선 여자아이에게 무턱대고 수작 부릴 만큼 뻔뻔하지 못한 것은 내 소심한 성격 탓이었다. 그렇게 대면 대면하게 서로를 대하면서 독서실을 오가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 뒤편으로 골목길 두 개를 더 돌아가면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알고 지낸 초등학교 동아리 선배의 집이 있다. 공교롭게도 형의 여동생이 나와 초등학교 같은 반이어서,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도 나를 동생같이 여기며 예뻐해 주었다. 그런 형에게서 당장 집으로 오라는 호출이 뜬 것이다.


쭈뼛거리며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바로 형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이런 정신없는 놈이 있나! 본 고사가 도대체 며칠이나 남았다고 독서실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이야! 왜 가만히 공부 잘하고 있는 애한테 수작이나 부리고 그래? 어디, 대답해 봐! 껌은 왜 주었어?"


도무지 영문을 몰라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껌이란 말이 들리면서 어리둥절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형이 어떻게 이 모든 일의 전말을 알고 있는 거지?' 형의 어깨너머로 생긋생긋 웃고 있는 형의 여동생이 보였다. 그리고 미처 덜 열린 문 사이로 거의 숨다시피 한 채 얼굴을 붉히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얼핏 보이지 않는가!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형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 어깨를 그 억센 손으로 탁 내리쳤다.


"사내 새끼가 이토록 용기가 없어 우짜노? 첫눈에 껌을 줄 만큼 마음에 들었으면 바로 들이대야지! 야이, 가시나야. 너도 얼른 이리 나와 봐라. 니도 진작부터 마음이 쏠렸으면 모른 척 눈웃음이라도 한번 쳐주지, 뭔 우사하려고 이런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해 샀고 돌아다니고 있노!"


알고 보니, 내 초등학교 동창인 형의 여동생과 그녀는 같은 여고에 다니는 둘도 없는 메이트였다. 그해 겨울, 대학 본 고사가 며칠 남지도 않은 그 어느 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인연으로 인해 우리의 첫사랑은 이렇게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와의 사이는 이후 순조로왔나요?


그녀는 전문대학 식품영양학과로 진학을 했었지요. 그런데 말로 좀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 닥쳐온 겁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여자 동창생과 형의 존재가 늘 함께 했거든요. 셋이나 넷이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물론 형에겐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었지만 주로 형 집에서 만나는 일이 많았기에 둘 만의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요. 어리기도 했지만 둘 다 여전히 마음속으로만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는데 익숙했었던지라, 연인 사이에 있을 법한 그 흔한 애정 표현조차 제대로 할 줄 몰랐고...


- 그러면 그저 그런 한 때의 여자 친구라 볼 수도 있겠군요.


여자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주변에선 이미 공인된 커플이 되고 만 거예요. 어딜 가든 옆자리는 나나 그녀를 위해서 누구든 먼저 알아서 비워 주는 겁니다. 우린 또 그게 당연한 일로 알고 주저 없이 받아들였고. 늘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죠. 그녀는 자신의 전공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플루트를 불었는데, 한 번은 앞산으로 놀러 가서 계곡에 함께 발을 담근 일이 있었습니다. 여름이라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마침 계곡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한쪽에서 친구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 온 막걸리를 마시던 중에 나의 그녀가 물가 바위 위에서 운율에 몸을 사뿐사뿐 실어가며 부는 감미로운 플루트의 음색이라니!


본격적으로 대학생활을 접어들면서 은연중에 그녀를 소홀히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 보다는, 술과 담배와 친구를 더 가까이하면서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외로워지면 가까운 공중전화로 달려가 서슴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몇 시간이고 나의 횡설수설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렇게 또 서너 달이 훌쩍 지나, 문득 그녀와 만나지 않은 시간이 너무 길어졌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면 그땐 또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만날 약속을 잇달아 며칠 씩 잡곤 했다. 술값이 부족한 자리에 불려 와서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키다 계산을 대신한 적도 있으며, 심지어는 해마다 봄에 열리는 과 페스티벌에도 초청을 받아보지 못한 그녀였다. 함께 어울려서 노는 페스티벌보다는 끼리끼리 노는 당구나 친구들 사이의 술자리가 더 마음이 편해,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페스티벌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말이다.


- 그렇다면 글의 제목을 '슬픈 페스티벌'로 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학기로 시작된 9월 어느 때인 걸로 기억납니다. 그때도 두어 달 서로 얼굴을 못 보고 지낼 땐데요.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녀와서는 이내 친척들과 함께 동해안으로 며칠 동안 해수욕을 수 밖에 없었긴 했지만, 무엇보다 이런저런 술자리에 자의반 타의반 불려 다니느라...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했더니 10월 말쯤 어느 날인가 시간이 나는지 묻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 학교에서 가을축제가 열리는데, 졸업작품전을 함께 니 올 수 있는지를 묻습디다. 당연히 갈 거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그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있진 못했어요.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긴 했지만서도 사실 신입생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 그래서 그녀와 함께 페스티벌에 가기는 간 겁니까?


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전화가 있고 난 뒤로 그만 또 연락이 끊긴 거예요. 사실 서로의 집으로 주저 없이 전화하기가 그때만 하더라도 망설여지는 시기였거든요. 아직은 여전히 어린 나이였고, 서로의 집에서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으니까. 한번 전화를 걸자면 없는 용기를 잔뜩 내야만 했지요. 그저 지난번 한 약속을 기억으로 믿고 있을 수 밖에요. 그런데 그만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야 말았던 겁니다.


귀가가 늦어질까 봐 집으로 전화를 했다. 10월 말이었으니 6시만 되어도 벌써 날은 저물었고, 좀 더 시간이 깊어지자 까만 어둠과 함께 더욱 쌀쌀해진 날씨 탓으로 두터운 잠바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벗어나 가게 앞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어머니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심상찮았다.


"네 여자 친구에게서 지금 전화가 열 통도 넘게 왔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조금 전 마지막 통화를 할 때는 억지로 울음을 숨기는 것 같던데, 정말 소리 죽여 우는 것처럼 들리더라."


온몸으로 소름이 돋으며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듯했다. 그 날인 것이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는 졸업 작품전과 함께 페스티벌이 열리고, 그녀는 과 교수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플루트를 연주하게 되어 있단다. 당연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스폿 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을 것이고, 과의 모든 친구들이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리라. 시간을 보니 이미 7시가 넘어서 있고, 그녀의 대학까지는 택시를 타더라도 족히 1시간은 걸릴 거리이다. 하지만 가야 한다. 미안해서라도 가야 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라도 당장 가야만 하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는데 벌써 8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낮 시간에 그녀를 따라 학교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여자대학이었으므로 출입이 자유롭지는 않았는데, 1학년 신입생을 위한 무슨 특별한 행삿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1년도 더 흐른 지나간 일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그만큼 더 낯설다. 우선, 불을 환하게 밝혀 놓은 건물 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벌써 여기저기에서 끼리끼리 팔짱을 낀 채 귀가를 서두르는 커플들이 보였다. 하긴 9시를 바로 눈앞에 두었으니 미리 행사장을 빠져나가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몰랐다. 용케 그녀의 소속 학과 행사장 표지판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름표가 올려진 원탁 곳곳이 벌써 듬성듬성 비어있고, 무대 앞에서도 초청된 밴드가 마지막 피날레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사이키 조명이 내 머릿속만큼 현란하게 돌아가고 내 마음은 덩달아 심란해진다. 부끄러움 속에 홀로 이 시간을 견뎠을 그녀를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혹시라도 몰라, 한번 더 전화가 오면 내가 있는 곳으로 전화해 달라고 어머니에게 미리 전화번호를 일러두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연결된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겠다는 그 말밖에 해 줄 말이 없었지만, 기다려달라는 부탁 아닌 당부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은 것이 8시를 이미 넘어 선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곳으로 곧장 달려온 것이다.


모두가 정장 차림이었으므로, 사람들 틈을 잠바 차림으로 헤집고 다니는데 굳이 술기운이 아니더라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반드시 그녀를 찾아내어 손이라도 한 번 꼭 잡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무슨 오기처럼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무리들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결국, 그녀가 자리에 없음을 확인한 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터벅터벅 내디디며 힘없이 교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한가지 바보 같은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맞아! 그녀는 날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을 왜 못했지? 그녀라면, 평소의 그녀라면...'


뛰어가는 걸음이 교문과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반드시 있어야 돼!'


멀리 교문 기둥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밤이기에, 어둠 속에서 더욱 짙어진 그림자가 마치 춤을 추듯 이쪽으로 돌아서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아니다! 내 눈물에 가려 잠시 그 모습을 분간 못할 만큼 순간적으로 흐려진 것이다. 과연,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고운 화장이 눈물로 지워져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힘주어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눈물을 훔치는 내 손길은 좀 전 추위로 떨던 때와는 달리 격한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품에 안긴 그녀가 영영 떠나버리고 말 것 같은 일말의 두려움에 휩싸여 깊은 자책과 후회의 눈물이 저도모르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 결국은 그녀와 헤어진 건가요?


글쎄 그게 지나고 보니 첫사랑이었던가 봅니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나서도 얼마간은 그녀와 예전 같은 관계가 유지되었던 듯해요.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더 이상 그녀가 내 곁에 머물러 있진 않았지만, 그릇 속의 물이 한번 크게 출렁거렸다가 다시 가라앉으면 자잘한 파문은 흔적조차 남지않듯 서로 담백해진 마음을 확인하게 된 후로는 미련 없이 자신의 옆자리를 비운 것이죠. 다만, 살아온 경험만큼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번엔 다시는 지지 않는 그녀의 별이 되고 싶어요. 그날 함께 돌아서 손 잡고 가던 길에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기도 하고요.


사실, 그녀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가까스로 연락이 된 여자 동창생에게서 어렵게 전해 들은 말이다. 우리들 사이의 지난 일들까지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그녀로서는, 우선 둘도 없는 친구의 죽음을 전하는 처치가 안타까웠으리라.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물기가 어린다. 그녀는 미처 모를 것이다. 묵묵히 참고 듣고 있는 내 마음속으로도 한 줄기 굵은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음을.


오늘도 밤하늘 별은 예전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는데, 난 그녀의 별이 되어 다시 만날 그날을 꿈꾸고 있다. 오롯이 밤이 깨어지고 있는, 이런 밤같이 까만 새벽 어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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