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끈기라는 말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해파랑길 산책로를 걷다 보니, 돌아서 오리라 애초에 마음먹었던 반환점이 바로 눈앞에 있고, 예의 그 노인은 오늘도 그곳,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내가 처음 노인에게 관심을 둔 이유는,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가까이다가가서 본 모습이 오히려 더 청년처럼 보이는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지럽게 쌓아놓은 데트라포트 방파제가 끝이 나고, 바로 이어서 마치 모래와 같은 몽돌이 깔려있는 바닷가에서, 노인은 막 낚시할 채비를 늘어놓던 중이었다. 그 뒤편에는, 취식(取食)이 가능하도록 개조된 미니 트럭이 안이 훤히 보이도록 오픈되어 있었는데 어질러진 침구(寢具)와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 식기(食器)로 미루어 집 떠나온 지 이미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
그는 민소매의 흰 라운드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옷이 땀에 절어 있긴 했으나 검게 탄 근육질의 양팔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오히려 보는 눈이 시릴 정도였다. 낯선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데,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검붉은 피부색과는 달리 얼핏 보아도 일흔은 족히 넘어 보였다. 굵게 골이 패인 이마의 주름과, 얼굴의 이목구비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자잘한 잔주름은 마치 오래 묵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어, 울퉁불퉁 겉으로 드러난 근육질 팔다리의 기세(氣勢)와 비교되어 묘한 이질감(異質感)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도 노인은 여전한 옷차림을 하고서 피크닉 체어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낚싯대 너머의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모른 척 가까이 다가가서는, 노인의 머리와 비슷한 각도를 유지해서 바다 쪽을 바라보니 보이는 건 눈앞에 드리운 낚싯대가 아니라, 멀리서 유유자적(悠悠自適) 날고 있는 갈매기 너머의 하늘이 맞닿은 곳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며칠 째 그는 똑같은 포지션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빈손이다. 스스로 행운의 숫자라 믿는 85일째 되던 날, 큰 바다로 나선 노인은 사투(死鬪) 끝에 청새치를 낚는다. 작품 속 노인은 염원하던 대물(大物)을 손에 넣었지만, 며칠간이나 지켜보았음에도 눈앞 노인의 낚싯대엔 그 흔한 입질조차 한번 오지 않았다. 민망한 마음이 들었을까, 노인은 다가 선 낯선 이의 존재를 분명 벌써부터알고 있었음에도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 속 노인에게 소년이 확고한 믿음을 가졌듯이, 나 역시도 이 노인에게서 풍기는 뭐라 표현 못할 노회(老獪)함에 이미 압도되어 있다. 노인은, 이 한적한 어촌 마을 바닷가에서 운 좋으면 봄 도다리 몇 마리라도 건질 수 있기를 바라며 그저 세월을 낚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런들 어떠랴! 이 따뜻한 봄날에, 내 눈에 포착된 프레임(frame) 속으로는 노인마저도 바다 풍경과 어울려 하나 된 채, 그야말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보기 드문 진경(珍景)을 그려내고 있다.
노인은 결국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상어 떼에 뺏기고 뼈만 남긴 채로 항구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빈 손이랄 수 있는가? 노인이 다시 빠져든 꿈속의 사자(獅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눈앞의 노인에게서 난 늘 빈 낚싯대만 보았을 뿐이다. 비록 곁눈질이긴 하지만, 노인의 깊은 눈 속에선 원망이나 회한(悔恨), 아쉬움이나 서두름, 욕심이나 미련과 같은 감정을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분명, 지금의 나와 공간을 달리하는 어느 시점에서는 분명 손 맛을 본 적이 있었을 것이며, 그랬기에 그는 오늘도 이 자리에 머물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내게 있어 이 노인은 늘 빈 손의 어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보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면 실체가 없음이 지당(至當)하지만, 난 이 빈 손의 어부에게서 늘 물고기의 비린내를 느낀다. 오히려 드리운 낚싯대의 수면 아래로는 바늘마다 주렁주렁 물어주기를 기다리는 물고기 떼들이 우글거리고, 스스로 마음이 내켜지면 때 맞춰 입질하는 낚싯대를 낚아채면 되리라. 그러면 되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그린 노인의 꿈속 사자는 지금 이 노인이 욕심 없이 기다리는 수면 아래의 우글거리는 물고기 떼와 다름 아니다. 마지막까지도 체념하지 않는, 언젠가는 대물을 낚을 것이란 희망을 헤밍웨이의 작품 속에서 읽었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는 노인의 검게 탄 구리 빛 몸을 통해서 마찬가지로 읽어낼 수가 있다. 사자와 같은 용맹함이 엿보이는 이 노인은, 그래서 오늘도 동해의 푸른 바닷속으로 주저 없이 희망을 투척(投擲)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이 있다. 여자인데, 가까이 가서 보니 짐작되는 나이보다는 훨씬 늙어 보인다. 낚시하는 노인과 100여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고무대야 네댓 개를 펼쳐놓은 채 마냥 퍼질러 앉아있다. 글을 쓰는 말투가 다소 사나워진 것은, 내가 평소 즐겨 찾는 바로 육손 바위 앞을 오롯이 그녀가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낚시하는 노인처럼 그녀 역시 며칠 째그 자리에 뿌리 박힌 듯 자리를 잡은 것이다. 소중한 무엇인가를 어쩔 수없이 빼앗긴 듯한 그런 찝찝함 때문인데, 마치 선착순으로 먼저 차지할 수도 있는 자리를 눈앞에서 놓치고 만 때의 심정과도 같았다. 잠시 심통이라도 부려 보려고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갔다.
"할매, 다라이가 왜 비어 있는교?"
이럴수록 좀 더 퉁명스러운 이쪽 바닷가 사투리가 제격인데,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그만 나긋나긋한 대구 사투리다. 힐끗 올려다보더니, 다시 데트라포트 너머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며 지나가듯 말한다.
"쪼매 기다려 보소. 이양 영감이 작업한 거 갖꼬 올 낄기네."
정말 얼마 안 있어, 물망태를 끌면서 머구리 한 사람이 육손 바위 위로 올라섰다. 머구리란 잠수부를 일컫는 이쪽 말인데, 과연 그녀의 바깥 영감은 처음의 짐작대로 그녀에 비해선 훨씬 나이가 덜 들어 보였다.
사실, 두어 달 전부터 바람이 사나워지고 난 다음 날이면 바닷가로 떠밀려 온 미역을 여지없이 줍고 있는 이 노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땐 그저 미역을 줍고 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녀의 남편이 물에 들어가서 미역을 직접 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망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니 미리 짐작했던 미역이 아니었다.
"할매가 여기서 미역 줍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미역이 아니네예?"
고무대야로 쏟아부은 것은 미역귀인데, 이쪽 말로 꾸다리가 대부분이고, 물속에서 다시 끌어낸 다른 망태엔 고동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는 해삼처럼 흐물흐물해 보이는 것도 더러 섞여 있기에 물어보니 데쳐서 삶아 먹는 군수란다. 망태에 미역이 없는 것은, 그들 말을 빌자면, 4월을 넘어서면 바닷속 미역은 이미 썩은 것이나 다를 바 없어 굳이 먹으려고 따진 않는다고 한다.
"자, 한번 먹어보소! 짭조름하니 맛있을 끼시더."
미역귀의 줄기를 중간에서 뚝 자르더니 대야로 채워지는 물에다 헹구고선 이내 건네준다. 집에서도 미역 줄기를 간장과 설탕을 섞어 무쳐서먹거나 성뚱성뚱 잘라서 초장에 찍어서 먹은 적도 있으니 냉큼 받아 입에 넣는데 과연 바다 맛이 그대로 전해졌다. 약간 비릿하기는 했으나, 뒷맛이 개운하여 다시 하나를 더 청해서 마저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 노인, 보기와는 다르게 참으로 살갑다. 그래서 말을 잇다가 그만 내 전직(前職)까지 밝히고 말았다.
"아, 선생님이었는교? 인자 퇴직했으니, 아파트 수위라도 해야제! 그런데 요즘은 이런 자리도 잘 안 나선다카데."
그만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족히 칠순을 넘기고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든든한 바깥 영감이 딱 버티고 있는 그 앞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선뜻 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자식 농사를 잘 지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지금 눈앞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그들에게는 단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선 말투부터 거리낌이 없다. 네가 받는 연금으로 생활하자면 뭐라도 해야 할 건데라는 걱정스러움이 말속에 담겨 있음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과연 노인은 덧붙이는 말로써 정곡(正鵠)을 찔러온다.
"하긴 고생했으니, 이젠 좀 여행이나 다니고 쉬어야제! 그런데 지름 값이 많이 올라 어데 차 가지고 돌아댕길라케도, 좀 그렇긴 하지요? 세상에 어디 안 오른 기 있나?"
혀를 차며 하는 말에, 내가 받는 연금이 당장 눈앞에서 오그라들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푸념 삼아 하는 말이라도 물가 때문에 힘들다는 말이야말로 연금생활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말인 것이다.
돌아서 갈 때는 산길을 택했다.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 등대 쪽에서 내려다보니, 두 노인은 여전히 있던 자리에 머물고 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노인!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현실 속 삶의 지향점은 서로 많이 다른 것 같다. 한쪽은 낚싯대를 느긋이 드리우고서, 당장 손에 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고 또기다린다.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또 한쪽은 당장 물속으로 들어가, 눈으로 직접 보고 취할 수 있다면 힘이 미치는 한 몸을 내던져서라도 기어이 손에 넣고 만다. 이 또한 현명한 삶의 방식이다. 전자가 미래 지향적이라면 후자는 확실히 현실적이다.
아래로 내려다본 바다는 말없이 노인을 꼬옥 품고 있다. 두 노인의 마음속 바다는 비록 서로 다른 깊이를 지니긴 했지만, 여전히 벅차오르는 희망으로 저마다 봄기운이 가득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