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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Aug 14. 2024

폭포의 아래위를 바꿀 순 없지만

미국에서의 영어교사 현장연수를 떠올리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부터 생각난다. 영어의 본고장으로 영어연수를 떠나는 일이야 지금이라도 꿈같은 일이겠지만, 30여 년 전의 미국은 정치와 경제를 비롯해서 사회와 문화, 과학과 예술을 망라(網羅)한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를 선도해 온 초강대국이었기에, 미국에서의 영어연수는 여러모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0여 년 가까운 세월 사이, 세계사의 흐름에 많은 굴곡이 있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정치 지형(地形)도 엄청나게 바뀌어,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세상이 도래(到來)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분야에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인류의 문명을 차세대로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 미국은 여전히 Superpower라지만 지닌 영향력이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다.


30여 년 전 경험을 현재의 상황과 혼재(混在)해 쓰려니, 그 사이 세월의 간극(間隙)이 무척 크다. 지금부터 내가 쓰고자 하는 연수 관련 경험담도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대수롭지 않은 한담(閑談)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폭포의 아래위를 바꿀 순 없지만 세상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심지어 처지가 바뀔 수도 있다.  지난날 소니의 영화(榮華)를 오늘날의 삼성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연수는 오전 8시 반에 시작해서 50분씩 3교시를 마친 다음, 두 시간의 런치 타임을 가진 후 오후 1시 반부터 4시 20분까지 오후 3교시를 진행했다. 무엇보다 우리 연수단을 흡족하게 한 것은 기숙사인 Summit Hall의 식단이었는데, 조식은 호텔식이고 중식과 석식은 뷔페였다. 연수 담당자인 George의 말에 의하자면 국제교육진흥원에서 책정한 식대가 매끼 20달러로, 지금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엄청난 특혜를 받는 셈이었다. 스테이크를 비롯해서 포크 (pork rib), 멕시칸 치킨 윙 등 다양한 육류와 신선한 채소류, 샐러드와 파스타는 메뉴에서 빠지지 않았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연수생을 고려해서 각 나라별 메뉴가 번갈아 나왔는데 20달러의 식대가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식재료의 퀄리티도 높아서, 송이버섯 생김새와 특유의 향을 빼다 박은 현지산(現地産) 버섯을 결대로 찢어서 미리 준비해 간 고추장에 찍어 먹은 기억이 난다.


미국으로 연수를 떠날 무렵 웬만한 학교는 어학 실습실을 갖추고 있었다. 메인 부스에서 들려주는 자료를 개별 부스에 비치된 헤드폰으로 듣거나 말하기 연습을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당시로는 최신 시설이었다. 일과 중 Individual Learning은 대학 교양학부의 어학실을 이용했는데, 개인별 펜티엄 컴퓨터와 모니터까지 갖춰진 그야말로 첨단시설이었다.


CD롬으로 접속해서 듣기와 말하기, 쓰기와 읽기에 어휘까지 영어의 4 skill 학습이 가능한 Individualized Learning 학습교재로 삼아 공부하면 영어가 금방 늘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러하듯, 선생님들도 프로그램을 구동(驅動)시켜 놓고는 담당교수의 눈을 피해 인터넷 세계로 몰래 숨어들곤 했다. Web Browser로 넷스케이프의 내비게이터를 이용해서 국내 뉴스를 서핑하거나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의 활약상을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면 컴퓨터에서 몰래 서핑한 흔적을 지운다는 것이 모니터의 아이콘을 몽땅 휴지통 속버려서 다음 시간 담당교수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든지 컴퓨터로는 처음 접하 신세계인지라 이를 무턱대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수를 받으면서 인상 깊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강사진의 열정과 시간 엄수였다. 한국에서의 영어연수는 연수를 받는 선생님들 의중에 좌우되어 하루 일과나 전체 연수일정이 끝나갈수록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곳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질릴 만큼 빡빡한 커리큘럼 가운데는 그래도 선생님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6교시로 배정된 American Culture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강의교재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자유토론을 하다가 이슈가 되는 내용이 나올 경우 현지 탐방으로 그 실체를 확인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가운데는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억들도 있다. 바로 마을 앞 세미트리(Cemetery, 공동묘지)를 지날 때였다. 우선, 마을로 들어서는 어귀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룹별로 인원을 배정하여, 현지 체험에 나선 길목에서였다. 우리나라처럼 봉분(封墳)을 쌓고 잔디를 입혀 놓은 무덤의 형태가 아니라, 평장(平葬)한 묘지 위로 묘지석이 들쑥날쑥 이어져 있었는데 그다지 낯설거나 흉해 보이질 않았다.


담당교수인 Colleen이 인솔을 위해 강의실 밖을 나서면서 신신당부했던 말이 있다. 뙤약볕을 피한다고 낯선 집 처마 아래로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당부였다. 우리 연수단이 오기 얼마 전, 강도로 오인한 집주인이 외부인을 사살한 사고가 인근에서 발생했고, 경찰이 내린 판단은 정당방위였다. 아침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물에 빠진 생쥐 마냥 갈팡질팡하는 꼴이 안쓰러웠던지 중년의 백인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잰걸음으로 다가와서는 우리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저녁을 준비 중이었는지 몰라도 고기를 구울 때 나는 구수한 기름 냄새가 낯선 이방인들의 시장기를 잔뜩 돋우었다. 오랜만의 저녁 만찬으로 칠면조 바비큐 파티를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뜻밖의 외지인을 손님으로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은 Morgantown 고등학교의 사회교사였는데, 지역 신문을 통해 우리 연수단의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귀여운 금발의 두 자녀가 스스럼없이 품에 안겨 기쁨이 더했는데, 자신들의 treasure box(보물상자)를 제각기 열어 그 속에 든 구슬이나 머리핀, 유치(幼齒)를 자랑하기도 했다. 보드게임을 하면서, 수업 중에 한국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미국 동요를 함께 불렀던 기억도 난다. 헤어질 땐 아쉬운 마음으로 몇 번이나 "See you again!"을 조아리며 손을 흔들던 아이들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또 다른 인상 깊었던 기억은 Morgantown의 흑인 공동체(Black Community)를 방문했을 때였다. 피츠버그에서 고속도로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Morgantown은 백인 중산층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WVU(웨스트 버지니아 주립대) 학생들 역시 백인이 중심이고, 히스패닉이나 흑인과 동양인은 소수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흑인들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흘린 피의 흔적과 그들에 의한 저항의 역사가 건물 곳곳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 방 저 방 소개하는 안내인의 형형(炯炯)한 눈은 마치 남북전쟁에서 노예 해방을 부르짖던 흑인 전사(戰士)의 그것 마냥 활활 불타올랐다.


그 밖에도, 국제교육진흥원과 대학이 우리 연수단을 위해 마련해 놓은 커리큘럼에는 영어교사들이 실제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업모형과 교수기법을 소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담당교수들은 저마다 자부심을 갖고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느 한 교수는 연수생의 고충을 토로(吐露)하는 자리가 불평불만의 성토장(聲討場)으로 변하자 이내 정색을 하면서, 우리 정부가 많은 비용을 투자해서 교사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본질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5분 간의 영어수업 실연(實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수생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려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개인시간까지 할애하며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여교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다. 또 한 사람, 연수의 시종(始終)을 함께 한 한국인 유학생 백인숙 양도 있다. 대학과 연수단의 틈새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법도 한데 내색 한번 없이 가교(架橋)의 역할에 온 힘을 쏟을 땐 나이 어린 누이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쯤은 본인의 장래 희망대로 유망한 영문학자가 되어 있을 테지.


30여 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다. 나라의 명운(命運)이 뒤바뀔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란 뜻이다. 뉴욕의 백화점 Macy's에 진열된 전자 스토어의 메인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일제 소니 캠코더였다. 눈을 씻어가며 찾아다니던 삼성 캠코더를 발견한 곳은 이름 모를 여러 상표의 제품들과 뒤섞여 옹색하게 보일 만큼 구석진 자리였다. 그게 너무 가슴 아파서, 한국에 돌아와 소니 캠코더와 가격대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삼성 캠코더를 손가락질받으며 사주었다. 그게 바로 3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삼성과 소니의 형편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미국의 영화(榮華)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초일류 강대국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미국이란 나라의 저력을 폄하(貶下)하거나 무시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다. 하긴, 미국이란 나라도 정신을 차릴 때가 되기는 했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대통령을 한 사람들부터 미국 우선주의를 신봉(信奉)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우리가 어려울 때면 흔히 내밀던 영원한 우방이니, 맹방(盟邦)이니 하는 구호(口號)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때울 수 없을 만큼 틈새가 이미 벌어져 있을지도 모르지.


여전히 우리나라 영어교사들은 미국으로 줄줄이 연수를 다. 국내 연수를 포함해서 6개월에 걸친 장기 연수도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테솔)은 이제 영어교사들이 지녀야 할 보편적 능력으로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 있다. AI(인공지능)를 활용한 실시간 통번역 기능은 영어교사가 앞으로 허물 수 없는 옹벽(擁壁)이 될는지도 모른다.


늦은 밤, 그래서인지 끝 모를 상념(想念)이 이어지고 있다. 폭포의 위아래를 뒤바뀔 순 없겠지만 세상은 이미 달라졌고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는 결국 도태(淘汰)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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