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공원(沙防公園)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기에서, '사방'이란 '산지(山地)나 강가의 모래와 흙이 바람과 비에 씻겨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는 일'을 말하는데, 포항 흥해읍 오도리의 바닷길에 자리 잡고 있는 사방공원은 근대적인 사방사업을 시작한 지 100주년을 기념하고, 조림(造林)과 녹화(綠化) 사업이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强占期)와 6ㆍ25 동란을 거쳐 태반이 민둥산화되어 버린 우리나라 산지를 산림이 우거진 곳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하도록 만든 시발점이 바로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이다.
1969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부러움을 산 것은 요세미티의 울창한 산림만이 아니라, 산세(山勢) 역시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요세미티를 둘러보면서 박대통령의 머릿속에 요세미티에 못지않은 설악의 절경(絶景)이 떠올랐고, 이를 발판으로 1970년에설악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설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산(名山)으로, 관내의 신흥사(神興寺)와 더불어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립공원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요세미티와 가까워질수록 울창한 산림을 뚫고 우뚝 솟은 암벽과 겹겹의 암봉 사이를 가르며 흘러내리는 폭포, 계곡을 따라 무성하게 우거진 숲은 크기나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설악의 산세와 버금갈 정도였다. 요세미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대한 화강암 절벽 '엘 캐피탄(El Capitan)'과 돔 형태의 웅장한 화강암 봉우리인 '하프 돔(Half Dome, 아웃도어 브랜드인 North Face가 이를 형상화하여 브랜드 로고로 쓰고 있음), 그리고 3단(三段)으로 이루어진 요세미티 폭포(Yosemite Falls)는 설악의 울산바위나 공룡능선의 암벽, 그리고 토왕성폭포를 연상시켰다. 박대통령이 요세미티를 보고 왜 설악을 떠올렸는지 금방 알 것 같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세쿼이아 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으로 가는 길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 Mountains)의 줄기를 따라 줄곧 이어져 있었다. 얼마 전, 서부 산악지대에서 발화(發火)된 산불이 산맥을 타고 계속 북쪽으로 번져가다 연수가 끝날 무렵에 가까스로 진화(鎭火)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과연, 산불로 잿더미가 된 산림은 멀리서 보아도 피폐(疲弊)했다. 실화(失火)나 방화(放火)에 의한 인재(人災)이든, 아니면 천둥이나 번개, 아니면 건목(乾木)끼리의 마찰로 인화 자연발화(自然發火)든 간에, 있어서는 안 될 재앙이 덮치고 간 후의 풍경은 가히 인세(人世)에 펼쳐놓은 지옥도(地獄圖)나 다름없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그러면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老巨樹)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공원 주차장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는데, 인종도 다양했다. 특히, 머리에 터번을 두른 데다 전통의상까지 입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도인과 히잡을 쓰거나 차도르 차림의 이슬람인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한국인 관광객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는데, 주머니가 많이 달린 등산조끼에다 힙색(hip sack, 허리춤에 차는 천가방)을 두른 사람은 십중팔구 한국사람이었다. 그런데, 함께 길을 나선 가이드가 고사리나 눈에 익은 산나물이 보이더라도 절대 채취(採取)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마, 나이 든 교민(僑民)이나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생각 없이 산나물을 뜯다가 레인저(ranger, 산악 경비원)에게 발각되어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된 일이 왕왕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쿼이아는 낙우송과(落羽松科)에 속하는 상록교목(常綠喬木)으로 우리가 흔히 삼나무로 알고 있는 나무이다. 수천 년을 살아온 거대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나무 사이사이로 트래킹 코스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생명을 다 해 말라죽었거나 거센 태풍에 뿌리 채 뽑혀 쓰러진 고사목(枯死木)도 군데군데 보였는데, 오히려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품위 있게 종결(終結)한 듯 보였다. 모름지기 생명을 가진 존재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기에, 눈앞의 고사목이야 말로 삶과 죽음에 대한 교본(敎本)으로서, 살아있는 자들의 교만(驕慢)을 징치(懲治)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세쿼이아 앤 킹즈 캐년 국립공원(Sequoia & Kings Canyon National Park)과 세쿼이아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고산지대를 벗어나, 조슈아 나무(jodhua tree)와 선인장이 키 낮은 관목(灌木)과 어울려 자라고 있는 황량한 사막지대를 지나게 되었다. 다양한 파충류와 방울뱀(rattlesnake), 온갖 독충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소문으로만 듣던 미공군의 주력 에드워드 공군기지가 있다는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이었다. 모하비 사막을 가로질러 한참 달리다 보니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왔는데, 바로 캘리코(Calico) 은광(銀鑛)이었다.
청교도가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를 해 온 후, 유럽의 아웃사이더들도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대서양을 건넜다. 대서양을 면(面)한 대륙의 동부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잡아 살아가던 이들에게 노다지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모두를 들뜨게 만들었다. 이들은 금이나 은맥(銀脈)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골드러시의 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백인들이 중동부에서 서부로 차츰차츰 삶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암묵적(暗默的)으로 유지해 오던 평화가 깨어졌다. 총과 화약으로 무장한 백인들이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을 핍박(逼迫)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결국 자신들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극렬(極烈)하게 저항했던 원주민이 바로 모하비 사막과 미대륙의 남서부 일대를 삶의 본거지로 삼았던 아파치 부족이었다.
캘리코 은광은 바로 이런 서부개척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하지만 지금은 유령 마을이 되어버린 곳이다. 19세기말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번성했던 이 광산지역은 은 가격이 폭락하면서 쇠락(衰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20세기 초에 대부분 주민들이 마을을 등지면서 이름 그대로 캘리코 유령 마을(Calico Goast Town)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민속촌처럼 마을의 원형(原形)이서부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함으로써 관광명소로 기사회생(起死回生)할 기미(幾微)를 보여주었다. 마을 곳곳에는 서부시대를 재현한 역마차와 원주민 인형, 채굴(採掘)한 은을 실어 나르던 철길과 역사(驛舍)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결국, 폐광(廢鑛) 투어나 서부시대 생활체험, 사막 하이킹과 기념품 판매와 같은 현장방문을 통해 캘리코는 서부지역 여행에 있어 빠트릴 수 없는 필수코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캘리코를 떠나면서, 당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피해 갈 수 없었던 삶의 굴종(屈從)이 느껴졌다. 애초에, 신대륙으로 건너와 풍토병(風土病)을 겪고 있던 백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쪽은 원주민들이었다. 그래서, 늦가을 수확의 풍요로움을 감사히 여기며 그 기쁨을 이웃 원주민과 함께 한 것이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의 시작이었다. 그랬던 것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백인들에게 내주고 서부지역으로 송두리째 강제 이주되는 비극적 파국(破局)을 맞게 되었는데, 이들 백인들에 의해 삶의 영역이 강제(强制)된 곳이 바로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으로, 그 운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체로키(Cherokee) 부족이다. 이들 부족은 이주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찬송가인 '놀라운 은총(Amazing Grace)'를 체로키어로 번역해 불렀는데,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집단이주과정에서 15,000여 명 가운데 5,000명 이상이 질병과 사고 등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동시대를 함께 살면서 가해자인 백인들이 염원했던 신의 은총과 피해자인 흑인들이 간구(懇求)했던 신의 은총 사이에 어떤 '놀라운' 간극(間隙)이 있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여정(旅程)은 멀고도 험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서 요세미티와 세쿼이아 국립공원을 지나 모하비 국립 보호지역과 캘리코 유령마을을 거쳐 라스베이거스까지 가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네바다 주의 모하비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와 그랜드 캐년까지 관광을 모두 마치면 이제 서부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LA로 출발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또 이틀을 보낸 다음,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나면 미국에서의 연수일정이 모두 끝나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가까운 곳에 있는 후버댐을방문하지못한 것이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創出)하면서 암울했던 대공황(大恐慌) 시대를벗어나도록 기여한 것이 바로 후버댐 공사였다.
이처럼 미국인들이 지난(至難)한 시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끈기와 협동심이었다. 우선 봐서 무모해 보이는일에도 결코 두려워않는 미국인의 도전정신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후일, 요세미티의 산세나 울창한 산림, 후버댐에서 영감을 얻어, 온 나라를 치산치수(治山治水)하고 설악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게 없는국립공원으로 탈바꿈시킨 우리 민족의 저력도 이에 못지않은 것이다. 다만,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설악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무척 아쉽다. 아마, 관광 인프라가 노후(老朽)되었거나 수명이 다해서 일 것이다.
해외연수를 통해 내가 느낀 바가 크듯이, 우리 젊은 세대들이 미래를 보는 안목(眼目) 또한광대(廣大)할 것이다. 등을 떠밀어서라도 보다 넓은 세상으로 이들을 내보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세월은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날지 모르지만, 머릿속에 홑실과 날실로 엮어놓은 기억의 망(網)은 생각 이상으로 촘촘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의 이치요,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