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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24. 2024

라스베이거스에서

나는 승부욕이 없다. 어떤 위치나 이권(利權)을 두고 남과 경쟁하는 것 또한 탐탁지 않게 여긴다. 교사로 평생을 살아온 삶의 궤적(軌跡)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탁구나 당구를 일찍 시작한 편이어서 또래보다 잘 치긴 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시들해졌다. 내기를 싫어하고 승부에 연연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고스톱이나 포커를 칠 때도, 주머니에서 돈이 나갈 때보다는  앞에 쌓인 수북한 돈에 오히려 신경 쓰였다. 결국, 이런 자리를 한 두 번 피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는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사행심(射倖心)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간혹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편의점에 들를 때면, 눈앞의 즉석 복권을 긁지 않고 나올 때가 별로 없다. 다시 말해, 타인과의 경쟁은 즐기지 않지만 혼자 하는 놀이를 탐닉(耽溺)위험성은 늘 안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노름이며 도박이 아닐까?


금세라던 라스베이거스는 한참을 달려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먼지 폴폴 날리는 황량한 황무지 한가운데로 도로만 뻥 뚫린, 차창 밖으로 더러 건물들이 보이긴 해도, 무숙자(無宿者) 머물 성싶은 남루한 모텔 주유소만 듬성듬성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어 마을이라 부르기에도 손색 있었다. 그런데, 형형색색의 깜빡이 전구로 치장한 건물이 도로 양쪽에서 차츰차츰 잦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온 사방으로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했다. 마침내 라스베이거스로 입성(入城) 한 것이다.


호털에 체크인을 하기 전 가이드가 우리에게 당부한 말이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이 합법화된 도시이니만큼 돈을 따든 잃든 100달러 한도 내에서  없이 도박을 즐겨보라는 것이다. 물론, 잭팟이 터지는 행운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설령 돈을 잃는다 하더라도 라스베이거스를 관광한 입장료로 지불한 셈 치면 그리 아쉬울 것이 없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2인 1실로 배정된 방에 짐을 밀어 넣고는 곧장 호텔을 빠져나왔다. 우리가 머문 힐튼 호텔(현재는 West Gate Hotel로 바뀜)이 스트립(The Strip) 에 있는 5성급 호텔이어서 인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이 몰려있었다. 용암 분출쇼로 널리 알려진 미라지(The Mirage) 호텔 엠지엠 그랜드(MGM Grand) 호텔, 프로권투 세계 타이틀 매치가 자주 열리는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 호텔 앞은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우선, 조명 쇼부터 보려고 다운타운에 있는 프리몬트 스트리트(Fremont Street)로 이동을 했다. 지금은 LED 전광판으로 대체되었다지만, 당시는 형형색색의 전구와 네온사인으로 조명 쇼를 연출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광경이어서 정신이 혼미(昏迷)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여름철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여기저기 노출이 심한 핫팬츠에 브라 탑을 한 쇼걸들과, 물밀듯 밀려드는 흑백황(黑白黃)의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瑤池鏡)이었다.


다시 스트립 지역으로 돌아와 유명 호텔 안을 둘러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금덩어리 중 하나를 랜드마크로 삼은 골든 너겟(Golden Nugget) 호텔과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컨셉인 룩소르 라스베이거스(Luxor Las Vegas), 중세의 궁전을 컨셉으로 삼은 엑스칼리버(Excalibur) 호텔과 거대한 사자상이 상징인 엠지엠 그랜드 호텔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인지는 몰라도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려 가까이 가보니, 내부가 개방된 작은 무대 위에서 중년의 초대 가수가 귀에 익은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디저트와 음료를 서빙하는 카페인데, 입구의 베너에는 놀랍게도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얼굴이 프린팅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노래 'Sweet Caroline', 'Solitary Man'과 'Song Sung Blue'를 뜻밖의 장소에서, 그것도 정말 우연찮게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던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마침내, 내게 주어진 운빨을 시험해 볼 시간이 다가다. 100달러를 니켈(nickel, 5 cent), 다임(dime, 10 cent), 쿼터(quarter, 25 cent)와 하프 달러(half dollar, 50 cent), 달러(one dollar, 100 cent) 코인으로 각각 환전(換錢)을 했다. 원래, 일상생활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동전은 페니(penny, 1 cent)와 니켈, 다임과 쿼터로 네 종류이지만 카지노의 슬롯머신에는 페니를 제외하고 코인 단위별로 다양하게 베팅할 수 있었다.


문득, 월포리 바닷가 풍경이 생각났다. 해마다 피서철이 되면 다방 내실(內室) 모퉁이 벽면으로 슬롯 마신을 설치해 놓고 불법으로 카지노 영업을 했다. 친척들이 사나흘씩 피서를 오면, 퇴근을 월포리로 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밤이 깊어지면 요란한 술자리를 피하러 간 곳이 다방이었다. 당시, 사업을 하던 사촌형님이 개평으로 동전으로 어깨너머 배운 것이 다방식 카지노, 바로 슬롯머신이었다. 그 이전까지 파친코를 하러 적이 없었으니, 심심풀이 삼아 하는 전자오락이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서 불법 파친코의 폐해(弊害)가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모든 영업장이 일거에 철퇴를 맞고 모습을 감추었다.


잠복(潛伏)해 있었던 사행심이 다시 발동하나 보다. 슬롯머신의 기계음과 화면 속 과일이나 숫자, 별과 같은 문양(文樣)겹쳐져서 막대로 연결되면, 베팅한 코인의 액수에 따라 당첨된 배당금이 슬롯을 통해 폭포수처럼 와르르 떨어진다. 잭팟이 터진 기계의 상단 램프에 불이 들어오면 업장(業場)의 관리자가 요란한 박수소리로 돋우고, 기계와 씨름 중이던 사람들도 일순 고개를 들어 이웃의 행운에 시샘 어린 눈길을 보낸다. 옛날 월포리 기억과는 달리, 라스베이거스의 슬롯머신은 당첨 확률이 아주 높았다. 6, 70퍼센트 정도의 확률은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100달러를 슬롯 인하면 60에서 70달러를 슬롯 아웃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복권을 열 번 긁어 예닐곱 번 정도 당첨된다는 확률로 착각하면 큰 오산이다. 슬롯머신은 결국 매번 40달러라는 손해가 발생하지만, 장의 복권에서 금액이 제각기 다른 예닐곱 장이 한꺼번에 당첨되는 행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쌓아 둔 코인이 줄어들면서 조바심이 났다. 소액의 배당금이 당첨되면 바로 회수하지 않고 패스해서 몇 배로 부풀려진 당첨금을 노렸다. 슬롯으로 부풀려서 쏟아진 코인을 눈대중해 보니 얼추 150달러 이상으로 순식간에 불어나 있었다. 건너편 머신에선 5,000달러짜리 잭팟이 터졌다고 요란을 떨었다. 쓸데없는 웅심(雄心)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웅심이지, 실은 사행심이면서 옹심이었다. 니켈에서 다임으로, 다임에서 쿼터로 코인의 액수를 올리고 난 이후로는 종종 터지던 당첨 횟수도 부쩍 줄어든 것 같았다. 한번 더 패스를 하고, 눈을 꾹 감고 두 번째 패스를 하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멈춤 버튼을 누르니 운 좋게도 풍선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배당금에 당첨이 되었다. 살짝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계산이 쉽도록 코인별로 구별해서 쌓아둔 숫자 헤아려 보니 적어도 200달러는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게임하는 중간중간 갈증이 나서 음료나 칵테일을 넙죽넙죽 받아마셔서인지 취기마저 덩달아 올라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벅지 안쪽까지 깊숙이 트인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백인 미녀가 옆 머신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더니, 게임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슬롯에서 코인이 쏟아지면 박수를 치면서 아예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 앉기도 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더 이상 베팅하지 않고 남아있던 니켈과 다임을 슬그머니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마음 한편으론 이내 속이 뜨끔했다. 여자의 정체가 비로소 짐작된 것이다. 필경 스트리트 걸(street girl, whore 혹은 prostitute 매춘부)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코인이 다 떨어지자마자 가슴이 깊숙이 패인 몸을 기울이더니 귓가에 대고 룸 넘버를 알려달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룸으로 올라가서 기다릴 테니 키를 달라는 뜻이었다. 나도 모르게, "No way!"라고 단호하게 외쳤다.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사람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창궐(猖獗) 이 나라에서,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지만, 아무리 관광지이긴 해도 한편으론 가슴이 뜨끔하긴 했다. 교사의 신분으로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민망한 현실이 자책감(自責感)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크게 휘둘렸는지, 베팅하는 족족 실패가 반복되었다. 간혹 슬롯으로 서너 푼씩 코인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남은 코인이 오히려 밑밥이 되어 자리에 계속 눌러앉게 만들었다. 100달러씩 몇 차례 더 환전을 하러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꼬박 밤을 새웠던 것이다. 마지막 베팅을 앞두고 옆자리에 남아 구경하던 동료 선생님에게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던 니켈 몇 닢을 건넸다. 룸으로 돌아가는 길에 통로 앞 슬롯에다 자기가 갖고 있던 코인과 함께 동전을 몽땅 털어 넣고는 손잡이의 밸브를 당겼더니 테이블 위 경광등(警光燈)요란스럽 번쩍거렸다. 놀랍게도, 2,000달러짜리 잭팟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벙어리 냉가슴이라더니, 어쩌겠는가? 그건 그 선생님의 운빨이었고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LA로 넘어가서 술이라도 한잔 사겠다 하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정작 기가 막힌 일은 이 럭셔리한 호텔에서 제대로 된 샤워조차 한번 하지 못하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걸음걸이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가이드가 체크아웃할 때까지 기다리다 잠시 호텔 로비에 있는 의류 상가로 들어갔다. 게스 청바지를 디스플레이해 놓은 상점이었다. 필라델피아 한인 의류 할인점에서 20달러로 구입했던 청바지가 이곳에선 120달러였다. 속으론, '도독 놈들!'이라 욕을 해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아웃렛이란 개념조차 없을 때였으니, 정품을 파는 본매장과 아웃렛 사이에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땐 자초지종을 모르니 그저 욕설이 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흙먼지 속으로 멀어지고 있는 라스베이거스를 몇 번씩이나 되돌아보았다. 분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본전 생각도 났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지만 그땐  행운을 품으리라 다짐을 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는 길 양쪽에도 남루한 간판의 카지노가 듬성듬성 보였다. 실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함을 이미 맛보았기에 도로변 건물들이 더욱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를 한참 벗어난 한적한 도로변에 하필이면 카지노가 들어서 있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가이드의 말을 빌자면, 라스베이거스에서 돈을 몽땅 잃은 사람의 주머니 속 동전마저 털어낼 목적으로 영업 중인 곳이라 했다. 하지만, 오늘 새벽 동료 선생님에게 찾아든 행운을 생각하면 돌아가는 길 막바지까지 카지노를 찾는 사람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랜드 캐년으로 가는 길은 줄곧 콜로라도 강으로 이어져 있다. 수백만 년 동안 거친 물살에 깎이고 깎여 형성된 협곡(峽谷)이 그랜드 캐년이니 콜로라도 강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런데, 강을 따라가다 보니 라스베이거스 외곽의 풍광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휴양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주로 은퇴한 부호(富豪)들이 노후를 보내는 곳으로, 카지노를 비롯해서 호텔과 병원 등 온갖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강이 얼마나 맑고 푸른지 팔뚝보다 큰 고기들이 무리 지어 유영(游泳)하는 모습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면허를 가진 사람들만 강낚시를 할 수 있고 하루에 잡을 수 있는 물고기의 마릿수도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도박과 도벽(盜癖)은 가장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이는 병증(病症)이다. 나는 돈에 대한 집착이 심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기에 도박과 도벽과는 본연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러나, 도박의 전조(前兆) 증세라 할 수 있는 사행심은 내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즉석 복권을 파는 편의점이나 또 뽑기를 하는 행상을 한 때는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아무튼 판돈을 걸고 남의 돈을 탐하는 사행성 짙은 놀이는 내게 있어선 여전히 도박이나 다를 바 없다. 나를 닮아서인지 아이들도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포커나 고스톱을 쳤다는 소릴 들어 본 적이 없다.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날 라스베이거스에서 맛봤던 쓰라린 경험이 시도 때도 없이 짓쳐들던 사행심을 억누르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또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예컨데, 아무런 사전 공부나 준비 없이 요행이나 바라면서 주식한다고 나댔을 지도 모를 일이고, 그 결과는 불문가지가 아닐런가.


오늘은 마침, 찬바람이 불어서 더위가 한풀 꺾였다. 그런데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뉴스가 요약되는 TV 화면에는 개미들의 아우성으로 요동을 친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마음 한편이 썩 개운하질 않다. 어느 슬롯에다 자신을 행운을 쓸어 담았는지 모르지만 이들 모두에게도 하나같이 잭팟이 터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MGM Grand / Harrah's
Caesars Palace의 벽화
Caesars Palace  / Treasure Island / Luxor Las Vegas
카지노를 배경으로
World's Largest Gold Nug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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