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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26. 2024

세상도 넓고 미국도 넓다

미국의 대도시 가운데서 LA는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도시이다. 우선 한국 교민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곳이면서, 동부지역의 뉴욕과 더불어 미국으로 여행할 때 서부지역의 관문(關門) 역할을 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난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LA 중심가의 여러 복잡한 교차로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도로의 경계를 구분하는 차선(車線)이었다. 낮엔 몰랐는데 밤이 되어 사방이 어둑해지자, 가로등의 불빛만으론 차선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순간, 왕복 10차선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로(大路)의 차선을 따라 점멸등(點滅燈) 켜지면서 차로(車路) 사이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당시의 한국은, 야간운전을 위해 야광 페인트로 차선을 도색(塗色)해 놓은 것이 고작이었을 때였다.


시카고의 밤과는 달리, LA의 다운타운은 밤늦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1992년 LA 폭동이 있은 지 불과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선지는 몰라도, 일말(一抹)의 경직(硬直)된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서 느껴졌다. 예를 들어, 필요 이상으로 낯선 사람을 경계하곤 했는데, 이는 뉴욕이나 Morgantown 같은 동부 사람들의 행동 양상(樣相)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인 경찰관에 의한 흑인 청년 로드니 킹 구타(毆打) 사건이 흑백 간의 인종차별로 비화(飛禍)하여 결국은 유혈사태를 촉발(觸發)했는데, 이는 1992년 LA 폭동의 시발점(始發點)이 되었다. LA의 대표적인 흑인 게토(ghetto, 특정 소수집단이 편중된 지역)인 콤프톤(Compton)은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렌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끼어 있었다. 주로 흑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던 한국인 상인들은 평소부터 이곳 흑인들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폭동 초기에 LA 경찰이 관공서나 백인 부촌(富村)인 베버리 힐스의 진입로를 막아버리자, 흑인 폭도들은 인근의 코리아타운으로 몰려가 한인상가를 약탈하고 방화(放火)를 서슴지 않았다. LA 폭동으로 인해 한인 사회는 약 4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고, 4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응분(應分)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흑인에 대한 반감(反感)과 불신은 여전했다.  


오늘의 일정은 디즈니랜드 관람과 코리아타운 방문이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체험형 테마파크라면, LA 디즈니랜드는 세계 최초의 디즈니파크란 명성에 걸맞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와 직접 만나 사진을 찍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청장년층이 주소비층이라면, 디즈니랜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가족주소비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시설면으로는, 마치 한국의 롯데월드를 크게 확대해 놓은 것처럼 온갖 놀이기구들이 관람객의 동선(動線)을 따라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지 시장기가 돌면서 갈증이 났다. 그늘곳은 시원했지만 햇빛이 드는 곳은 한여름 뙤약볕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했다. 그늘막 같은 간이매점에 앉아 햄버거와 콜라를 주문했다. 그런데 우리가 앉은 테이블 아래로, 비둘기만 한 텃새가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기어들어왔다. 세상 어디에 살든 참새를 닮은 텃새는 야성(野性)을 버리지 않는 한 인기척이 감지되면 포르르 날아가 버린다. 그게 바로 텃새의 습성이다. 그런데, 디즈니랜드의 텃새는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져서인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이미 비둘기화 되어버린 텃새는 무뎌진 부리로 관람객의 꽁무니를 쫓아가며 신발을 쪼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국은 땅덩어리도 크지만 텃새조차 작은 비둘기만 한 크기이다. 세상 모든 것이 크고 대단하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본 오대호(五大湖)바다나 진배없고, 광활한 그레이트 플레인스(Great Plains, 대평원)는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곳에 이를 때까지 야트막한 구릉(丘陵)조차 보이질 않았다. 요세미티의 엘 캐피탄(El Capitan)은 세계적인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로 수직으로 높이 솟은 거대한 화강암 절벽의 높이가 무려 900m에 달한다. 욕심이 났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신대륙의 주류(主流)로 등장했듯이, 이제부터라도 대한의 청년들 또한 이 땅 곳곳에서 한 톨의 밀알이 되어 든든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어쩌면, 이번 교사 국외연수의 기저(基底)에는 이 같은 내적(內的)

목적이 수반(隨伴)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 도널드 덕 같은 클래식 캐릭터들이 몰려나와 관람객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팡파르가 울려 퍼지더니 마칭 밴드(marching band)와 함께 화려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디즈니 프린세스(princess, 공주)로 분장한 재현 배우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뒤편으로 라이온 킹 가장행렬(假裝行列)이 지나갔다. 잠시 아이들 생이 나서 마음이 애틋했지만, 이틀만 지나면 원 없이 아이들을 품에 안을 수 있다 생각하니 그리운 마음이 씻은 듯 가라앉았다.


점심은 코리아타운으로 이동을 해서 식당을 함께하는 한인상가에서 해결했다. 일주일간 서부지역을 여행하면서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식사문제였다. 한식에 안달이 나 있었던 첫 몇 날은, 한인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반주(飯酒)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동안 잊혔던 한식의 미각(味覺)이 되살아나자 혀끝이 요사(妖邪)스러워졌다. 맛을 감별(鑑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부턴 은근히 식당에 들를 때면 옆테이블의 양식(洋食)에 눈길이 쏠리곤 했다. 하지만, 일행 중 몇몇은 곧 죽어도 한식을 고집했고, 일정에 잡힌 식단을 바꾸자면 추가비용이나 복잡한 셈법이어지기 때문에 부득불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뒤를 따라야 했다.

 

동부지역을 여행하면서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 폭포에 들렀을 때다. 가이드가 지나가는 말로, 필요한 선물이 있다면 면세점에서 미리 구입해 두라고 했다. 물류비용까지 고려해서 원산지 특산물이나 기념품을 구입하면 가격이 다른 곳에서 살 때 보다 훨씬 저렴(低廉)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캐리어에 넣어서 이동을 하다 보면 포장이 훼손(毁損)되거나 제품 자체가 손상되어 변질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가이드를 불신해서 험담을 하기 일쑤였다. 다시 말해, 기념품 구입을 알선(斡旋) 해 주고 판매가의 일정 비율로 커미션을 먹는다는 낭설(浪說)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한인상가를 둘러보면서 우리의 예단(豫斷)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금세 깨닫게 되었다. 정작, 가이드의 몫이 책정되었을 것 같은 한인상가에서는 기념품을 구입하도록 강권(强權)하는 말이 일절 없었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아예 빼기조차 비추질 않았다.


귀에 착착 감기는 말투와 눈웃음으로 무장(武裝)상가 여주인이 시종 곁에 붙어 서서 할인가(割引價)노래 부르고 다녔다. 마치, 동포인 우리들만 인을 해 준다는 듯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옆에서 서성이면 금세 입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나에겐 확고한 기준치가 있었다. 바로 필라델피아의 한인 의류상가에서 20달러의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한 청바지였다. 원산지가 중남미 국가로, 내가 구입한 것과 똑같은 청바지가 물경 80달러인데, 그것도 20% 특별할인된 가격이란다. 아마,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 진열된 120달러짜리 신상품이 이곳의 판매 기준이 된 듯 보였다. 영양제나 손톱깎기처럼 Morgantown의 마트에서 산 물건도 이곳에서는 가격이 족히 서너 배는 비쌌다. 미국으로 오기 전 지인들이, LA 상가의 상인들은 동포를 빌미로 한국인 여행객에게 바가지를 씌운다더니 대로였다. 굳이, 이전에 산 가격을 거론하며 장사에 재 뿌릴 이유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머물다 밖으로 나와버렸다. 금방 식사를 끝내긴 했지만 입맛이 구리면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다음날은 모닝콜도 없었다. 호텔에서 조식(朝食)마치자마자 바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 개인 휴대품을 제외한 나머지 짐과 캐리어는 각자 알아서 승합차에 실었다. 이날 오후 호텔 로비로 다시 모이면, 승합차를 타고  바로 공항으로 가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출국수속을 밟게 될 것이다.


호텔 입구는 인천 숭덕여고  선생님의 고등학교 친구가 차를 주차해 놓고 진작부터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를 마저 마치기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이었는데, 고맙게도 하루 연차이 선생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룸메이트인 선생님과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함께 차를 타고, LA의 바닷가 휴양지인 산타모니카 피어(Santa Monica Pier)로 이동을 했다.


산타모니카 피어는 산타모니카 해변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영어로 'pier'가 부두를 의미하니, 판자를 덧대 만든 피어는 오랜 세월 동안 부두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부두 위에 식당과 상점이 들어서고 인근에 놀이기구와 수족관까지 갖춘 위락지구(慰樂地區) 생기면서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산타모니카 피어는 미국의 역사적인 도로 ‘Route 66’이 끝나는 점이기도 한데, 이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Route 66’은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2400여 마일에 이르는 도로로, 대륙 개척기로부터 시작된 '미국인의 꿈(American Dream)'과 '(富)에 대한 열정'의 여정(旅程)을 고스란히  있어 미국인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 도로라고 한다.


우리가 바닷가 모래 위를 걸을 때는 이미 피서철이 지난, 그야말로 철 지난 바닷가였다. 길게 이어진 부두 위로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지만, 넓은 백사장에는 거의 인적이 끊겨 있었다. 얕은 바다에다 발을 담그고 있는 어린아이와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엄마들 풍경은 한국의 여느 바닷가나 다를 바가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서 막 불을 붙일 때였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선생님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멀리 있을 땐 체구가 작아 보여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열네댓 살은 되어 보일 만큼 키가 훤칠했다.


대충 오가는 말은 이러했다.


"Hey, got a light? Lend me, please."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면서  선생님이 말을 받았다.


"Sure! No problem. 이 썅노무 시키야!"


담배를 입으로 문채,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있는 아이에게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지만, 얼굴 만면엔 여전히 미소로 가득했다.


"Man, have a nice  day! 이 시키야, 닌 아비도 없냐?"  


속사포처럼 이어지던 말이 끝나자, 아이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Thank you, sir."를 되풀했다.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저으기 씁쓸했다. 요즘처럼 한류(韓流)유행했더라 혹시 알아들을까 싶어 꼬리말을 붙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부두의 잔교(棧橋) 위 레스토랑에서 바닷가재와 파스타로 점심을 해결하고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LA의 유명 쇼핑몰로 이동을 했다.


한인상가에서 팔던 청바지가 이곳에서는 40달러였다. 친구의 말을 빌자면, 같은 제품이라도 주마다 세제(稅制)에 따라 제품에 붙는 택스(tax, 세금)가 다르고, 생산지에서의 이동거리에 따라 물류비용에서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인상가의 청바지 가격은 바가지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의 말에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 남은 숙제를 이곳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50만 원의 적지 않은 여행경비를 지원받았기에, 교장선생님에게 선물로  양제 한 통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함이 있었다. 진열된 상품을 둘러보던 중에 눈에 쏙 들어오는 제품이 있었다. 골프에 대한 관심이 크던 터라, 교장 선생님이 해병 1사단 체력단련장의 당해 연도 챔피언임기억해 내고 골프용품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매장직원의 말에 의하면, 그립 파지(把持)와 스윙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스윙연습기가 신제품으로 나왔다기에 군말 없이 구입을 했다. 골프공도 쓸만한 걸로  더즌(3 dozen, 36개)을 추가했다. 그제야 숙제를 모두 끝낸 것 같아 적이 마음이 놓였다.


출국수속까지 마치고, 탑승(搭乘)기다리고 있는데 감회(感懷)가 남달랐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보름도 되지 않아 한국을 떠났지만, 귀국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아이의 존재가 실감이 났다. 이제 비행기 안에서 새날을 맞으면, 날자 변경선을 지나면서 하루가 더 보태져 8월 12일 06시 15분이 될 것이다. 미국으로 올 때와는 항로(航路)와 비행거리가 달라, LA에서 김포공항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는 9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장거리 행으로 인한 고통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기내식(機內食)을 먹느라 간간이 눈을 붙였다 뗐다를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김포공항이었다. 입국수속을 모두 마칠 때까지도 몸이 별로 피로하지 않았고 오금이 저리지도 않았다.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포항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야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시차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5년 3월 학기에 영어교사로 교직에 몸을 담고 나서 1996년 7월 초순에 미국으로 국외연수를 떠났다. 만 10년이 넘어서야 찾아온 기회로, 로또 같은 행운이었다. 이듬해부터 우리나라는 IMF로 인해 엄혹(嚴酷)한 시련의 시기에 접어들었고, 국외연수는 언제  다시 재개될는지 기약이 없었다. 감히 이 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밝히지만, 영어교사로 미국에서 연수를 한 경험은 나 자신은 물론 향후 영어수업을 준비하고 교수활동을 하는데 자양분(滋養分)이 되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사실이다.


처음, 미국 국외연수의 경험담을, 그것도 30여 년이 흘러 교직에서 퇴직까지 한 마당에, 그간의 소회(所懷)와 함께 글로 남기려 마음먹었을 때는 이처럼 여러 편의 글로 이어질 줄 꿈에도 몰랐었다. 늘 글을 쓰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제때 기록을 해두않았으니 흐려진 기억에만 의지해야 하는 수고와 위험이 따른다. 그러면, 구체적인 사실보다는 관성적(慣性的)인 사고의 흐름을 좇아 감성(感性)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굳이 이실직고(以實直告)하자면, 흐려지고 무너진 기억의 일부는 국외연수 이후로 넓어진 안목(眼目)과 여러 지식전달 체계의 도움을 받았. 하지만,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네'라고 고려의 유신(遺臣)인 길재(吉再)가 노래했듯이, 비록 우리는 일선(一線)에서 물러났지만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의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은 넓고, 배우고 익혀 도전해야 할 미국 또한 여전히 넓다.


디즈니랜드 / 라이온 킹 가장행렬
산타 모니카 피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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