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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25. 2024

LA에서 꾸는 American Dream

미국으로 올 때부터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랜드캐년이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르긴 해도 미국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를 꼽으라면 열에 예닐곱은 그랜드캐년을 꼽는다. 사실, 동부지역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서부지역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이미 자연의 경관에는 충분할 만큼 압도되어 있었고, 그랜드캐년으로 오는 길에 들렀던 요세미티와 세쿼이아 국립공원, 그리고 모하비 사막을 거치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단단해졌다. 어떻게 보면, 미리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 겨울을 맞는 사람의 심정이랄까, 정작 그랜드캐년을 눈앞에 두고는 마음이 그저 무덤덤했다.


요세미티를 보면서 설악을 떠올렸지만, 기실 그랜드캐년이 가까워지고 나서는 주왕산의 거대한 암벽기암괴석,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깊은 계곡을 머릿속에 그렸다. 라스베이거스를 출발한 승합차는 황량한 사막의 물줄기를 따라 한참을 달려왔지만,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익히 알던 골 깊은 계곡의 자취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주왕산의 수려(秀麗)한 풍광(風光)이 스산한 모래바람 속으로 여지없이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승합차에서 내릴 때, 지난봄 서부지역을 먼저 여행하고 온 손위동서의 말이 기억났다. 잔뜩 기대를 하면서 그랜드캐년의 초입(初入)까지 이르렀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이나 일반 화보를 통해 보아 왔던 그랜드캐년의 지형이나 지질학적 특징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해 적잖이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살짝 비탈진 구릉(丘陵) 위로 올라서서 그랜드캐년을 눈으로 품는 순간 그만 숨이 턱 하니 막히더라고 다. 도저히 필설(筆舌)로는 형용(形容)없을 만큼, 이전까지 경험한 적도, 사진 한 두장으로 담기에는 어림도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랜드캐년은, 콜로라도 강이 수백만 년에 걸쳐 침식작용을 되풀이하여 형성한 V자 형 협곡(峽谷)이다. 총연장 길이는 446K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30Km, 가장 좁은 곳은 180m이며 최대 깊이가 1.8Km에 이르는 엄청난 위용(威容)을 자랑한다. 가이드의 인솔로 뷰포인트에 이르니, 협곡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 때문에 장내가 몹시 어수선했다. 트래킹에 나선 사람들은 주로 가벼운 행장(行裝)에다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팔등신의 몸매에 비키니를 입고 온몸을 구릿빛으로 태닝(tanning)한 젊은 여성이 특히 눈에 띄었다.


협곡 아래쪽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주의를 기울여보니 개미같이 보이는 작은 사람들이 강의 언저리를 따라 오밀조밀 움직이고 있었다. 계곡의 분지(盆地)에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이 있다더니 그곳에서 생활하는 인디언으로 보였다. 사전에 신청한 사람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협곡탐방에 나섰지만, 계곡 안을 비행하다 돌개바람에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작부터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려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외관은 한국에서 보던 플라스틱 간이 화장실과 다르지 않은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천장에 달린 팬(fan)이 바로 회전하면서 에어컨이 가동되었다. 간이 음용대(飮用臺)에서 냉수가 나오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버스로 돌아와서 LA로 출발할 때까지도 그랜드캐년의 웅장한 경관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20억 년 전부터 쌓이기 시작한 협곡의 암석층은 지형이 바뀔 때마다 퇴적암, 변성암, 화성암 등으로 지층의 성질을 달리하며 켜켜이 쌓여 지질학 연구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마치, 지구를 떠나 멀리 우주를 여행하다 낯선 행성에 발을 내디딜 때, 착륙선에서 바라본 지표면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처녀지(處女地)인 것이다.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뷰포인트에서 보았던 젊은이들처럼 가볍게 행장을 꾸려 다만 몇십 리 길이라도 계곡을 따라 함께 트래킹 하고 싶은 마음이 협곡 아래의 물안개처럼 머릿속으로 자욱이 스며들었다.


LA로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일정에 여유가 생겼다. 8일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할리우드, 9일에 디즈니랜드와 코리아타운 관광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떠나게 될 10일 저녁까지는 자유시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이드와의 계약은 9일 저녁을 끝으로 종료되고 그 이후부터 개인별 일정으 LA 자유여행이었.


서부지역을 여행하면서부터는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미국의 대도시를 관광하려고 일정을 짤 때 가장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이 바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였지만, 하필이면 오늘이 내 생일날이었다. 객지에 나와서까지 내세울 일은 아니었으므로 룸메이트인 신 선생님에게만 살짝 귀띔해 놓았다. 저녁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맥주나 한 잔 함께 기울일 수 있다면 그 걸로도 족할 일이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개장(開場)을 알릴 때부터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테마파크 입구에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로고의 조각상을 배경으로 사진부터 찍었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동선(動線)을 따라가면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분장한 배우들과 슈퍼 히어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들은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짓궂은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를 재현(再現)한 테마 존이 관심을 끌었는데, 그중에는 '워터월드 존(Waterworld Zone)'도 있었다. 


간대 별로 공연시간이 정해져 있어, 마침 이동 중에 공연이 시작된 '워터월드 존'으로 서둘러 입장했다. '워터월드'는 1995년 9월에 개봉을 해서 전 세계적으로 흥행돌풍을 일으킨 영화로,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았다. 지구의 먼 미래, 빙하가 녹아내려 물의 세상이 된 지구에서 인공섬을 배경으로 해적들과 생존투쟁을 벌이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워터월드 존'에서는 해적들과의 전투신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투신이란 것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떠 있고, 모터보트끼리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신을 벌이다가 무대 뒤편에서 갑자기 경비행기가 솟구쳐 오르더니, 비행기 후미(後尾)에 불이 붙은 채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해적으로 분장한 재연배우들이 관객석으로 올라오더니, 혹시 오늘이 생일인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란다. 어찌할까 머뭇거리고 있는데, 옆자리의 신 선생님이 기어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생일선물로 기념품이라도 전해줄지 몰라 재연배우가 다가올 때는 솔직히 마음이 살짝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워터 건(water gun)을 겨누더니 물을 마구 쏘아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주변사람들까지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말았다. 관람객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 했고 배우들은 냅다 돌아서더니 도망을 쳤다. 하지만, 지금껏 받아본 생일선물 가운데 가장 기쁘면서도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 고마운 날이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어트랙션(attraction, 테마파크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와 시설을 통칭하는 말) 가운데는 궤도열차를 타고 테마 존을 두루 둘러보는 프로그램도 포함되어 있었다. '킹콩(King Kong)'과 '쥐라기 공원(Juraasic Park)'을 포함해서 여러 인상적인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을 재현한 테마 존을 하나씩 거쳐가던 중에, 갑자기 열차 앞의 다리가 무너지더니 계곡으로부터 엄청난 물이 쏟아지면서 다리를 삼켜버렸다. 바로,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f The River Kwai)'를 재현한 테마 존이었다. '콰이강의 다리'는 어릴 적 명화극장을 통해서 보았음직한 영화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라는 사실 말고는 영화의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진 영화 속 장면은, 눈으로 직접 체험하지 못했더라면 어느 누구의 말이라도 헛소리라 치부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오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찾았다. '명예의 거리'는 1960년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영화배우의 위상을 높이면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스타의 이름이 새겨진 별 모양의 타일을 도로에 박아놓은 거리를 말한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배우의 별을 일일이 찾아 확인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당시 그 어떤 별들보다도 인기가 절정이었던 마이클 잭슨의 별을 찾아 기념으로 남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할리우드 대로(Hollywood Boulevard)'를 따라 동과 서로, 그리고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 따라 남과 북으로 펼쳐진 도로에서 마이클 잭슨의 빛나는 별을 찾는 것은 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 중에서 낯선 별자리를 찾을 때처럼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곳에 당대(當代) 최고 인기스타의 별자리가 있음감안한다면, 사실 마이클 잭슨의 별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지난 사나흘 사이에 정말 특별난 경험을 했다. 우선,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인간이 대자연의 척박(瘠薄)환경에 맞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도시의 이면(裏面)을 엿볼 수 있었다. LA처럼 인간이 생존을 위해 삶의 지평(地平)넓히는 과정에서 자생(自生)한 도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욕망과 이로 인한 잠재적 위험을 해소할 배출구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소개(疏開)된 지역을 택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도시가 라스베이거스였다. 그리고, 그랜드캐년은 인간의 발길이 닿긴 하지만 여전히 대자연 그 자체로 남아있다.


LA에서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휴식과 위안을 얻을 목적으로 찾는 위락(慰樂)이나 근린시설(近隣施設)이 관광의 중심이라면, 라스베이거스는 오로지 인간의 내재된 욕망을 합법적으로 분출하는 도락시설(道樂施設)에 방점(傍點)을 두고 유희(遊戱)와 먹거리를 관광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랜드캐년은 웅장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면서 자아를 성찰(省察)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다.


내일이면 마침내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지난 며칠에 걸쳐, 삼인삼색의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라스베이거스와 그랜드캐년, 그리고 LA를 돌아보았다. 오늘밤 나는, 과연 이 중에서 어떤 꿈을 꾸게 되는 것일까? 미국의 밤하늘은 여전히 아득히 멀고도 깊다.


'American  Dream' by Nitty Gritty Dirt Band

https://youtu.be/GFSiisBYZ3U?si=mCXxj_lvlJn6iZOY


그랜드캐년의 다양한 지형
그랜드캐년의 전경
그랜드캐년과 나 / 'Waterworld' 테마 존
'Waterworld' 전투신
'Waterworld'의 실전을 방불하는 전투신
'콰이강의 다리' 테마 존
'쥐라기 파크' 테마 존 / 마이클 잭슨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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