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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n 23. 2022

길가에 앉아서

긴 가뭄 끝이긴 하지만 지난주에는 간간이 비가 내렸다. 장마를 앞두고 날이 더워지자 더욱 습해진 공기로 인해 이내 온몸이 후줄근해진 것이 더 이상 모자를 쓰기가 성가셨. 모자 쓴 머릿속으로 송골송골 맺땀은 귀밑머리를 따라 방울져 흘러내리다 귓불이나 챙을 타고 뚝뚝 떨어지 했다. 볕을 잠시 가려주긴 지만, 땀으로 눅눅해진 모자 속의 기이한 열감(熱感)으로 인해 더 이상 모자를 쓰고 있기가 거슬려지기까지 한 것이다.


조금 전 집을 나설 때의 일이 생각났다. UV 차단제로 옷감이 마감되어 있는 여름철 긴팔 후드를 입으려고는 진작부터 생각하고 었지만, 안에 받쳐서 입을 티가 마땅치가 않았다. 퇴직한 뒤 주섬주섬 사 면티와 라운드 티를 네댓 장식 개어 놓은 것이 옷장 선반에만 여러 칸이었다. 날이 덥지 않을 땐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입고 나서 2, 3일씩 번갈아 돌려가며 입어도 괜찮았지만, 베란다에 말리는 옷이 서너 장 겹쳐지자 이내 집안에서 쿰쿰한 땀냄새가 났다. 결국,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 날이 10여 일 가까이 이어지자, 선뜻 손이 가는 옷은 불과 몇 장 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고민 끝에 골라 입은 옷은 작년 초 손아래 동서가 보내 준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의 '블랙 이글'이 앞뒤로 크게 프린팅 되어 있는 검은색 라운드 티였다. 학교에 근무할 때는 입을 생각조차 못했지만, 올해는 날이 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며칠 전부터 모자와 세팅하여 입기 시작한 옷이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면티나 면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것이 크게 신경 쓰일 때가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는 셔츠 정도가 교사들이 지켜야 할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였던 셈인데, 지금처럼 커다란 비행기가 등판에 요란하게 프린팅 되어 있는 옷을 입을 날이 내게도 오다!


그래선지, 집을 나설 때는 기분이 그저 날아갈 듯했다. 30분 가까이 바닷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후드를 겹쳐 입은 몸 안이 더워지면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후드를 벗어 허리에 두르고 모자를 벗었다. 옆을 지나가는 아줌마가 곁눈질로 내 상반신을 쓱 훑고 지나치는데, MTB 탈 때 처음으로 앞이 불룩한 레깅스 반바지를 입고,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일이 떠올랐다. 괜히 안절부절못하다 마침 문밖을 나서던 옆 통로 아줌마그만 눈이 마주친 것인데, 부끄럽고 쑥스러운 생각이 그날 자전거를 타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그때와는 기분이 또 달랐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겉옷으로 후드를 입었을 때와는 달리, 라운드 티로 가려진 배 둘레의 몸매가 그만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고 만 것인데, 의식적으로 배를 집어넣고 몇 발짝어도 다시 도드라지게 배가 불러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여름 한 철 보고 식스팩 복근을 만들기 위해 서너 달 전부터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해 죽자살자 운동한다는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닐 성싶었다.


반환점으로 삼은 포항 여객선 터미널이 눈앞에 있었다. 포항 시가지 전도(全圖) 앞에서 손짓으로 여기저기 도면(圖面)을 짚어가며 뭔가 의논을 하고 있는 듯한 중년의 여자 두 사람이 보였다. 각각 백팩(backpack)을 메고 있는 데다 워킹 스틱(walking stick)까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이, 그저 바닷길이나 걸으려는 모습처럼 보이진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슬쩍 다가 가 말을 걸어보았다.


"포항이 처음이신가 봐요? 제가 근처에 살고 있으니, 이 주위는 조금 알고 있는 편인데. 어딘 가 걸으려 오신 것으로 보이는데, 목적지가 어딘가요?"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가까운데 살아요. 대구에서 왔는데, 이곳 영일대 해수욕장을 출발해서 죽천 신항만까지 걸으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둘만 답사를 왔는데, 날 잡아 동호인 모임에서 동해안 해파랑길을  걸어보려고요."


보아하니, 근처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막 길을 건넌  보였다. 여기서 출발하면 아무리 서둘러도 목표지점까지는 세 시간은 족히 걸릴 테니, 왕복하면 도합 여섯 시간의 거리이다. 눈앞에 보이는 '스페이스 워크'나, 여기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스카이 워크'까지 돌아보자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소요될 테니 시간적으로  때 살짝 무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내쳐 말하면 이건 정말 오지랖이며 꼰대 같은 행동이다. 


마침 되돌아가는 방향이 같아, 영일대 누각까지 가서는 그쯤에서 일부러 길을 달리했다. 무슨 일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더 이상의 친절은 자칫하면 섣부른 오해를 불러일으켜, 본의 아니게 서로 낯 붉힐 일이 생길 수도 있지 겠는가.


조금 더 길을 서둘다 뒤 돌아보니, '스페이스 워크'로 접어드는 샛길을 택했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그녀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멀리서 바닷속 해녀들이 긴 호흡으로 내뱉는 날숨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마치 애절하게 부르는 남도(南道) 가락처럼 들렸다. 


어느덧, 거친 바람소리 속에서 들리 색소폰 소리가 보다 선명해졌다. 전통 놀이공원의 상설 무대에서 공연이 막 시작된 게 분명했다. 그런데, 금방 시작한 연주가 귀에 익숙한 것이 바로 김세환이 부른 노래 '길가에 앉아서'였다. 공연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서도 무대 앞 객석에 열 지어 놓아 둔 플라스틱 의자는 여전히 비어있었지만, 길 건너편 바닷길 제방을 따라 길가에 앉아서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의식되었는지 첫 연주가 바로 '길가에 앉아서'였던 것이다.


이 길을 오가다 상설 무대의 색소폰 공연을 들으려고 일부러 길을 멈춘 적은 없지만,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이긴 해도 오늘은 바닷바람이 워낙 시원하게 불어서 내친김에 마저 연주를 듣고 가기로 했다. 송창식을 너무 좋아했던 탓이기도 하지만, 세시봉의 일원으로 항상 그와 함께 노래하는 김세환이 처음부터 좋았다. 트윈 폴리오의 멤버인 윤형주나 세시봉의 좌장(座長) 격인 조영남 보다도 그를 더 좋아한 이유는, 그의 부드러운 음색과 선해 보이는 인상 때문이었다.


김세환이 부른 노래 가운데, 윤형주 작곡의 '길가에 앉아서'와 송창식 작곡의 '사랑하는 마음', 이장희 작곡의 '좋은 걸 어떡해'는 노래와 함께 작곡가들 역시 내가 가장 최애 하는 사람들인 것이 무척이나 공교롭다.  더욱이, 김세환의 아버지는 당대의 유명 연극인으로, 원로배우인 김동원인데, 어릴 적 TV에서 그의 연기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에겐 그런 사실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 막 개업한 동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에 천 원씩, 석 잔을 테이크 아웃해 왔다. 현관에 들어서니, 온몸이 땀 투성이었다. 집을 나설 때는 뽀송뽀송했던 면티가 온통 땀으로 젖어 후줄근해졌지만, 기분만큼은 티 앞뒤로 프린팅 되어 있는 '블랙 이글'처럼 하늘을 찢고 날아오를 듯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나선 발걸음이었으나, 스스로 칭찬해 줄 만큼 오늘 일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아입을 속옷을 챙기러 옷장을 보는데, 면티와 라운드 티를 개어 놓은 선반에 잠시 눈이 머물렀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스캔해 본 것인데, 푸른색으로 층층이 가로 줄무늬가 나 있는 라운드 티가 무엇보다 마음이 쏠렸다. 이 옷 역시, 사놓고서 제대로 입어 보지도 못한 채 서너 해를 묵혀 놓고 있던 옷이다. 한 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옷인데, 그 당시 무척 입고 싶어서 산 옷이지만 결국은 입지를 못했다.


주말쯤이면 영일대 해수욕장 여기저기서도 버스킹이 열릴 것 같다. 그날은, 꼭 이 줄무늬 라운드 티를 입고 길가에 앉아 있을 것이다. 박수를 치고, 함께 노래도 따라 부르면서, 내 청춘의 온전한 밤을, 밤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미친 듯 즐기고 싶은 것이다.





블랙 이글 모자와 면티를 입은 나
스페이스 워크를 걷는 사람들
물질에 여념이 없는 해녀
먹이를 찾아 물질하는 어린 갈매기
산비둘기를 닮은 어린 갈매기

https://youtu.be/7AFZ1_Z0GUU

길가에 앉아서 (by 김세환)

길가에 앉아서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 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내 발걸음 가벼웁게
온 종일 걸어다녀도
즐겁기만 하네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
랄 라라 랄라라
랄랄 라라라라라
랄라라랄 라랄라
랄라라라라랄라

가방을 흔드는
그 손이 아름다워
뒷 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늘어진 가로수
내 발걸음 가벼웁게
온 종일 걸어 다녀도
즐겁기만 하네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
랄라라 랄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랄라라랄 라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
랄라라 랄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랄라라랄 라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랄라라 랄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랄라라랄 라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랄라라 랄랄라
랄라 라라라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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