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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n 25. 2022

운수 좋은 날

아침 일기 5

하루가 다르게 날이 더워지고 있다. 장마가 시작된다더니, 그저께 새벽에 내린 한바탕 소나기로 변죽만 울리고는 이틀새 날이 보란 듯 화창하다. 사나흘 뙤약볕 아래를 걸어서인지, 문밖을 나서면서 현관 거울에 비친 목덜미와 검붉게 타버린 귀밑 아래의 볼살 살짝 눈에 거슬렸다. 혈압약을 타러 동네 의원에 들렀을 때, 한 달 만에 만난 간호사가 내 얼굴을 보면서 인사치레 삼아 건넨 말이 그저 하는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등산 모자를 쓰려다가, 바로 옆에 포개 놓은 챙 넓은 벙거지 모자로 햇빛을 가리고 나니, 확실히 얼굴로 더 많은 그늘이 진다. 일단 집 밖으로 나오자, 사방으로 뚫린 거리로 사람들이 붐비는 것이, 과연 일상을 회복한 후의 토요일 아침다웠다.


환호해맞이 공원으로 꺾이는 도로에는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뒤로 길게 줄지어 서 있어, 장마가 예고된 날씨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휴가철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바닷가로 가려면 공원을 돌아서 가는 골목길이 더 그늘졌기에, 길 양쪽 폭이 좁은 사잇길을 택해 휘적휘적 걷고 있는데, 바닷길을 우회해서 공원 주차장으로 거슬러오는 차량들이 많아 잠시 한쪽으로 비켜섰다가 가기를 되풀이했다.


바닷길 산책로로 접어드니 생각 외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벌써 열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한창 햇빛이 울 때이긴 했다. 간혹, 자전거 전용 도로로 무리 지어 달리는 바이커(biker)들이 휙휙 곁을 지나쳐 갈 때, 그들이 길게 꼬리로 남긴 블루투스 스피커의 노랫소리가 파도소리와 섞여 길게 여운으로 남았다.


환호공원을 크게 돌아서 가는 바닷길, 제방 건너 데트라포트 너머에는 갈매기가 잠시 쉬어가는 암초가 있다. 간조(干潮)가 되어 물이 빠질 때는 많게는 열개 이상의 초(暗礁)가 수면 위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만조(滿潮)가 가까워지면 대여섯 개 밖에 밖으로 드러나질 않는다. 그런데, 저기 바다 위에서 한창 물질에 여념이 없는 갈매기의 발아래가 첫 번째 암초인데, 윗머리가 바닷물에 찰랑이는 것이 한 번씩 파도에 휩쓸리면 암초가 아예 물밑으로 잠겨버릴 때가 있다. 마치 갈매기가 물 위를 수중부양(水中浮揚)하고 있는 형색이 되는 것이다.


문득, 남태평양의 작은  폴리네시아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수면이 점점 상승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물속으로 잠기고 있는 나라. 만약, 언제가 이들 섬에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이 바로 상상 속의 모습이 아닐까. 인간이 버리고 떠난 마지막 남은 땅덩어리 섬머릿돌에 버티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을 갈매기...


암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갈매기는 잽싸게 물아래로 머리를 자맥질하더니, 기어이 주둥이에 작은 물고기를 물고 바닷물이 넘실대는 암초 위를 두발로 버티고 서있다. 무심한 파도가 발아래를 휩쓸고 지나가, 잠시 힘에 겨워 몸을 휘청이던 갈매기는 날개를 다시 추스르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물아래를 주시하고 있다.


멀리 영일대 누각 맞은편에 평소 보이지 않던 그늘막 천막이 여러 동 세워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명의 숲 가꾸기 운동 본부에서 시민들에게 분(盆) 나눠주기 행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소담스럽게 키운 나무 화분을 한아름씩 받아 들고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나같이 얼굴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슬그머니 사람들 틈에 끼어들자 금세 긴 줄이 뒤로 이어, 얼마 안 기다려 내 순서가 되었다. 네 개의 서로 색이 다른 스티커를 손등에 붙여주는데, 순서대로 텐트를 돌아가며 스티커 한 장을 떼주면 제각기 다른 잎사귀 식물 화분을 주었다.


사실, 화분을 받고 나니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스승의 날, 서울 사는 제자들이 해마다 보내 준 난초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분만 남은 게 네댓 개는 되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세 개의 분에도 물을 준 지 까마득한데, 또 네 개의 살아있는 식물 화분이라니. 하지만, 마음속으로 슬금슬금 올라오는 욕심이, 난생처음 집 근처 꽃집으로 발을 돌리게 만들었다. 얼핏 듣기에, 열대성의 잎사귀 식물은 물만 때맞춰 주면 무성하게 잘 자란다 하니, 분갈이하는 방법이라도 미리 알아 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개월 정도는 지금 심어놓은 분으로도 충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그늘에서 키우면 된다 하니 그제사 마음이 놓였다.


화분 꽂이까지 구해서 네 개를 한 곳에 담아 오는데, 이를 들고 있는 팔에서 금세라도 푸른 잎사귀가 돋아날 것처럼 힘이 넘쳐 올랐다. 새로운 생명을 집안으로 들인다는 것이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인 줄은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되돌아오는 길을 서둘러서, 바닷길 산책로에서 공원 쪽 사잇길로 접어들려고 할 때였다. 제방 바로 너머 데트라포트 위로, 길게 목을 빼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두루미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있는데, 갈매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 도 긴 발을 위태롭게 발아래의 데트라포트에 의탁해 바닷물 아래를 정찰하고 있는데, 목을 아래로 숙였다가 바로 쳐드는 순간, 길게 내민 주둥이 사이에는 퍼덕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얼마나 행동이 잽싼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목 아래로 먹이를 꿀꺽 삼키고 난 머리를 길게 들고는 뭔 일이라도 느냐는 듯 시치미를 뚝 다.


물고기를 잡아먹는 순간을 한번 더 사진에 담아보려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이 놈이 이번에는 양 날개를 활짝 펴더니 다이빙하듯 물아래로 자맥질했다가 바로 옆 데트라포트 위로 솟구쳐 내려앉는데, 조금 전 보다 훨씬 굵다란 물고기 한 마리부리 사이에서 머리와 꼬리로 가로로 물려 온 몸을 발버둥 치고 있다. 갑자기 화분을 든 팔뚝으로 소름이 확 끼쳐왔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야생의 세계를,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게 되다니! 


화분에다, 세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해서 양손으로 나눠 들고 집안에 들어서니, 막 방을 나서다 내 눈과 마주친 막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마 문밖에서 난 인기척을 듣고, 내심 기다리고 있던 커피를 받아주려고 나온 것일 테지만,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화분을 보고는 좀체 눈을 떼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일부러라도 집안으로 식물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니,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이후로 화분을 보살펴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다. 일단 베란다의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화분을 내려놓고 하나하나 물부터 주었다. 내심 생각해 두었던 화분 가꾸기 6개월의 첫날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만큼은 이 식물을 속절없이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은 없으리라 다짐을 하며 돌아서는데, 소파에 앉아 없이 시종(始終)을 지켜보던 아내의 황망스런 눈동자와 마주쳤다. 빈말이라도, 이번만큼은 단단히 각오를 밝히려다 실없어질까 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보다 씩 웃고 돌아서는 막내의 장난기 띤 미소가 괜히 얄미워졌다.




잠길 듯 말 듯 한 암초 위에서의 삶
먹이를 잡으러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는 갈매기
화분 1
화분 2
화분 3
화분 4
주말이어서인지 스페이스 워크 위를 걷는 사람이 평일보다 훨씬 많다
운수 좋은 날, 네 개의 공짜로 얻은 화분 아래 환호 해맞이 공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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